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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Nov 30. 2024

잊어버린 기억

티티와 달빛의 여왕

달빛의 여왕. 티티는 짤막한 두 단어를 낮게 읊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꿈속에서나 볼 법한 존재였다. 티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사색이란 것을 해 보고 싶었는데 피로는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녀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티티가 다시 눈을 뜬 건, 창문 틈으로 햇살이 스며든 아침이었다. 햇살이 약간 푸르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티티는 그것을 가을의 신호라고 여겼다. 햇빛에서 황금빛이 줄어들고 푸른빛이 늘어날수록 날씨가 차가워졌다. 그녀는 눈을 몇 번 끔뻑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식탁에 앉으니, 오랜만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눈썹이 짙고 수염이 많았다. 식탁 앞에서는 대개 신문을 보았다. 신문을 볼 때는 인상을 찌푸리거나 혀를 찼다. 하는 말도 비슷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요즘은 참 먹고 살기 힘들군, 갈수록 힘들어지겠지. 아버지의 말을 들을 때면 티티는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듣는 단어 중 긍정적인 것들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가 신문을 보며 험난한 세상에 관한 견해를 내보일 때면, 어머니는 막 만든 요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곤 했다. 메뉴는 매일 비슷비슷했다. 달걀과 베이컨 혹은 소시지, 빵, 수프, 어떤 때는 구운 채소나 감자가 접시 한편에 놓여있었다. 그날의 메뉴도 다른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티티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포크를 들고 깨작거렸다. 아침에는 항상 입맛이 없었다. 

“티티, 또 깨작거리는 거니? 많이 먹어야 제대로 일하지.”

“네.”

티티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구운 브로콜리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만족한다는 듯 다시 음식을 만들러 갔다.

“오늘 저녁은 간장을 넣고 닭고기 조림을 만들 거야. 감자를 곁들일 거고, 양파와 당근, 파도 크게 썰어 넣어야지. 닭 한 마리만 사용할 거라 아마 오늘 다 먹겠지? 그럼, 내일은 선물로 받았던 생선으로 튀김을 만들어야겠다. 큼지막하고 살이 많아서 튀기면 맛있을 거야. 레몬을 소스에 곁들이고 아스파라거스를 구워 내면 꽤 그럴듯하겠지?”

티티의 어머니는 언제나 음식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때로는 같은 이야기를 대여섯 번 반복하기도 했는데 모두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한다거나 앞으로 무슨 음식을 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말에는 청자가 없었다. 누가 듣지 않아도 혼자서 같은 말을 계속했다.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는지도 몰랐다.

티티는 신문을 보는 아버지와 홀로 음식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아침에 그리 늦게 일어나는 편이 아님에도 이상하게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며 부랴부랴 달려 정류장에 도착했고,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서 못다 잔 아침잠을 채우다 보면 금세 일터에 도착했다. 작고 빨간 우체국. 티티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많지 않았다. 우체국 국장은 비쩍 마른 남자였다. 사람은 나쁘지 않은데, 걱정이 많아 표정이 항상 어두웠다. 그는 직원들을 채근하지 않으면서도 실적이 낮거나 성질 급한 손님들이 버럭 화를 내면 안절부절못했다. 우체국이 바쁘지 않은 날은 별로 없었기에 국장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티티의 옆에는 세 명의 중년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금융을 담당했다. 세 사람의 대화 주제는 비슷했다. 사는 이야기와 누군가의 험담, 요즘 유행하는 TV프로그램, 직장 근처에 생긴 맛집 등. 잘 들어보면 세 사람은 자신보다는 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곤 했다. 하지만 굳이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티티의 옆자리에는 그녀보다 직급이 조금 높은 남직원이 앉아 있었다. 그는 티티와 함께 우편 업무를 담당했다. 나이는 티티보다 몇 살 많았고, 기혼자에 조용했다. 가끔 중년 여직원들과 대화를 하긴 했으나, 주변 사람들의 말이 많아진다 싶으면 입을 꾹 다물었다. 티티와도 별말을 하진 않았다. 그러다가 내키면 휴가를 냈다. 그는 직원 중에서 휴가를 가장 많이 쓰는 직원이었다. 

하루는 항상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갔다. 모순적이었지만, 그랬다. 손님이 너무 많아 힘들어서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 느껴지고, 동시에 손님들이 가져온 수많은 우편물을 정신없이 처리하다 보면 시간이 정신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하루도 일주일도 거의 비슷했다. 쳇바퀴를 돌리는 설치류가 연상되는 삶이었다.

퇴근을 하던 티티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 시절, 어느 선생님 하나는 너희가 일류 대학에 갈 확률을 적어보라며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티티는 별생각 없이 자신이 제일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을 적어놓았다. 그렇게 지나가나 싶었는데, 앞자리의 친구가 종이를 걷기 위해 뒤를 돌아보더니 한마디 했다.

“우와, 너는 이 대학에 갈 확률이 70퍼센트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20퍼센트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응?”

친구의 말을 들은 티티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친구는 그녀보다 등수도 높았고 공부도 더 열심히 했다. 듣고 보니 너무 높은 확률을 적은 것이 아닌가 싶어 신경 쓰였다. 그렇지만 귀찮아서 크게 고치지는 않고, 50퍼센트로 바꾸었다. 앞자리 친구는 그래도 높다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티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티티는 일류 대학에 가지 못했다. 앞자리 친구는 티티보다는 훨씬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이후로 간간이 친구의 소식이 들려왔다. 친구는 열심히 살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티티도 그랬다. 티티의 행복이 50퍼센트 좀먹은 상태였다면, 친구의 행복은 75퍼센트 좀먹은 채였다. 두 사람의 꿈과 미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암흑에 휩싸였다. 설치류의 삶을 알려준 것도 고등학교였다. 

사람들 속에서 멍하니 걷던 티티의 귓가에 지난 저녁 들었던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공원 쪽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안색의 남자는 오늘도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관중은 없었고, 그의 얼굴은 전날보다는 덜 상기되어 보였다. 무심코 지나치려는데 티티의 머릿속에 다시 어느 형상이 떠올랐다. 이전보다 뚜렷한 형상이었다. 

달빛의 여왕. 달빛의 가장 아름다운 면면을 그대로 그려낸 것만 같은 인물. 보름달처럼 밝은 금빛 머리칼과 은은하게 빛이 나는 미소, 초승달처럼 우아한 눈매와 가장 어두운 밤에도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는 두 눈.

티티는 분명 그녀를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를 잊은 것 뿐이었다. 아니,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그녀에게 달빛의 여왕을 기억하라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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