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와 달빛의 여왕
여왕의 모습은 눈부셨다. 창백한 초승달을 닮은 은빛 미소와 환한 보름달을 닮은 금빛 머리칼, 별처럼 형형한 눈동자. 그녀가 입은 섬세한 옷자락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사락거렸고, 때때로 축제의 불빛을 반사하며 다채롭게 빛이 났다.
여왕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걷는 이는 없었으나,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 이들은 꽤 많고 다양해서 행렬을 이루었다. 어떤 이는 여왕보다는 못했지만 화려하거나 위엄있어 보였고, 어떤 이들은 그들보다는 평범해 보였다. 익살스럽고 장난기 있어 보이거나 무리와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침울해 보이는 존재들도 있었다.
행렬은 단연코 축제의 주인공과도 같았다. 여왕과 그 뒤를 따르는 무리가 지나가는 곳 어디서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비켜주거나 넋 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흐뭇한 미소를 짓거나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행렬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분명했다.
티티도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느라 멍하니 서있다가 행렬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에 남은 건 나무를 장식한 반짝이는 전구와 나직하게 우는 가을 귀뚜라미 소리가 다였다. 그녀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다가 이내 빠르게 달렸다. 다시 행렬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대로 멀어질 수는 없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래야만 할 것같았다.
얼마간 달린 끝에 티티는 행렬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행렬은 막 복잡한 인파 사이에 섞여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행렬은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티티는 행렬의 맨 마지막에 있는, 꼬마 아이처럼 보이는 작은 사람 뒤에 섰다. 그러곤 행렬인 듯 아닌 듯 모두와 발을 맞추어 걸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티티를 알아보지 못했다. 티티는 쓸쓸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분을 다 느끼기도 전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한둘 나타났다. 인상 좋은 중년의 부인 한 명과 부모님 손을 잡은 어린아이 몇 명이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노인과 그녀 또래의 여성도 한 명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를 행렬의 일부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티티는 사람들의 인사에 화답하고자 손을 들었다. 손을 흔들긴 했는데, 모양새는 어색했다. 마음속에서 아쉬움과 기쁨이 동시에 일었다. 여전히 기분은 이상했다.
행렬은 계속되다가 축제의 거리가 끝나는 곳에서 사람들과 멀어졌다. 티티는 그곳에 남을지 행렬을 따를지 잠시 고민하다가 행렬을 따르기로 했다. 행렬은 인공 호수 한편으로 이어진 야트막한 뒷산을 올랐다. 뒷산에는 잘 다듬어진 등산로가 있었고 곳곳에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어 어둡지 않았다. 등산로 곳곳에 진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티티 바로 앞에 선 작은 사람이 키득거리며 낙엽을 밟았다. 낙엽을 밟을 때 나는 소리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티티는 왠지 즐거워져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을 따라 걷다 보니 금세 등산로가 끝났다. 등산로가 끝나는 곳에는 조금 더 험한 길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길은 편안했고, 급한 경사나 위험한 내리막도 없었다. 가을이 깊어 가며 앙상해진 나뭇가지 너머로 밝은 달이 보였다. 푸른 하늘에 뜬 달은 조금은 창백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표면에는 은은한 금빛이 돌았다. 마치 보는 방향에 따라 색이 변하는 보석과도 같았다.
본래 그곳에 있던 것인지, 아니면 달빛의 여왕이 남들은 모르는 길로 모두를 인도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행렬은 어느덧 넓고 편평한 공간에 다다랐다. 숲속의 광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왕좌가 하나 놓여있었다. 여왕은 왕좌에 앉고 대신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그녀 나란히 섰다. 여왕도 대신도 아닌 군중은 주변을 빙 둘러쌌다. 티티는 무리에 자연스레 섞여 들어갔다.
얼마간 군중은 우왕좌왕했다. 주변이 정돈되지 않자, 중앙으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키는 작지만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옆구리에 낀 기다란 문서를 펼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날카롭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지자, 소란스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는 모두에게 아주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고는 여왕을 비롯한 귀빈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경제장관, 정치장관, 명예장관, 문화장관, 산업장관. 무슨 무슨 장관의 직함이 차례대로 나열되었다. 장관들은 본인의 직함이 불릴 때마다 군중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장관이라는 직함에 맞게 그들은 모두 그럴싸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여왕만큼은 아니었으나, 화려한 옷을 입거나 위엄있는 표정을 지닌 이들이 다수였다.
티티가 한참 장관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옆에서 여러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주위를 몇 번 둘러보았으나, 고개를 숙이니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면용 모자처럼 끝에 방울 달린 모자를 쓴 작고 귀여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티티와 눈이 마주치자, 한동안 서로 대화를 나누다 한 명을 대표로 내보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표로 나온 작은 사람은 예쁜 붉은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안녕? 못 보던 친구네.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지?”
“네, 안녕하세요? 행렬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너는 이름이 뭐니?”
“‘티티’라고 해요.”
“멋진 이름이네.”
“고맙습니다.”
“이곳에 온 걸 환영해. 너도 여왕님을 따라온 거지?”
“네, 맞아요.”
“여왕님을 따라온 사람들은 항상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만들곤 해.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어.”
빨간 모자의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뒤에 선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티티는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학생이었던 시절,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막 그린 그림을 칭찬받았을 때와 비슷했다. 잊고 산 지 너무 오래된 감정이라 과거에 느꼈던 감정이 맞나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티티가 막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하고 있는데, 그녀 곁으로 다른 몇몇 사람이 다가왔다. 키가 아주 크고, 종잇장처럼 마른 몸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다가오자, 티티는 갑자기 주변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얼굴 색은 새벽달보다 더 창백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눈썹이나 입을 움직여도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섬뜩하고 무서웠다. 입은 옷도 짙은 남색과 진회색, 검은색처럼 어두운색이라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몰랐다.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은 작은 사람들과는 달리, 냉정한 얼굴로 티티를 바라보았다.
“여왕님을 따라왔다고 해서 모두 제대로 된 걸 만드는 건 아니지. 오히려 형편없고 볼썽사나운 걸 만드는 녀석들이 태반이야. 그리고 네게서는 특별함이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걸?”
그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과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티티의 마음은 차갑게 확 식어버렸다. 아담하고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암흑으로 뒤덮인 낭떠러지에 내몰린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티티가 침울해하자, 작은 사람들이 그녀 옆에 쪼르르 와서 섰다. 그들은 티티를 빙 둘러싸고는 키 큰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보아도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으나, 키 큰 사람들은 곧 자리를 떴다. 그들이 사라지자, 작은 사람들도 하나둘 티티 곁을 떠났다. 이제 티티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의 동시에 따스함과 차가움을 느낀 티티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작은 사람들과 큰 사람들, 그들 중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낙관적인 생각이 드는가 싶으면 키 큰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비관적인 생각이 드는가 싶으면 작은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혼란스러웠던 티티는 본래 있던 자리를 떠나 비교적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향했다. 어디든 군중에 섞여 들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발길을 돌리다 보니 그녀는 자연스레 장관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녀와 가까운 곳에는 경제 장관이 서있었다. 그는 여왕 다음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각기 다른 반지를 끼고 있었다. 금색의 반지 위에서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값비싼 보석이 잔뜩 반짝였다. 티티는 정신없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걷다가 실수로 그와 살짝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아주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쓸모없어 보이는 자가 또 하나 늘었군.”
경제장관은 대놓고 그렇게 말하며 티티를 지나쳐버렸다. 티티는 제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장관을 맞닥뜨렸다. 자줏빛 옷을 입은 그는 왕관은 아니지만 머리에 높은 사람이 쓸 것만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티티가 분명 곁에 있었음에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 앞에서 세상에 없는 존재와 다름없었다.
연속해서 두 장관을 지나친 티티는 갑작스러운 피로감을 느꼈다. 당연했다. 금요일 저녁, 곧장 집에 가서 쌓인 피로를 푸는 대신에 시끌벅적한 축제 행렬에 발을 들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빛의 여왕을 직접 보게 된 것이 신기해서 따라온 것이었으나, 그곳에서 느낀 감정은 모두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그만하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집에 가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집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여왕을 보고 싶은 마음에 왕좌 쪽으로 시선을 돌린 티티는 예상치 못한 순간과 마주했다. 때마침 주변을 둘러보던 여왕과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그녀는 순간 경제장관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왕이 냉정한 표정을 지을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여왕은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티티는 안도했고 무겁지 않은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