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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Dec 28. 2024

그림과 연주

티티와 달빛의 여왕

티티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한두 달에 몇 번 찾아오는 공휴일에도 빠지지 않고 스케치북을 채웠다. 

그림을 다시 그릴수록 선은 조금씩 안정되었다. 스케치북의 첫 장에 그린 여왕과 최근에 그린 여왕의 모습은 꽤 달랐다. 스케치북의 너덜거림도 덜해졌다. 가끔 급한 일이 있어 그림을 못 그리는 날도 있었는데, 확실히 다음 날은 선이 거칠었다. 선을 긋는 일도 매일 하다 보면 발전하는가 싶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과 함께 가을은 더욱 깊어졌다. 티티는 퇴근길, 호수 근처를 둘러 걷다가 예쁜 낙엽 하나를 주웠다. 붉은색과 주황색, 노란색이 잘 어우러진 낙엽이었다. 낙엽을 보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달빛의 여왕이 떠올랐다. 머릿 속 그녀는 예쁜 낙엽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영감이 떠오른 것이었다. 티티는 알고 있었다. 그럴 때는 떠오른 것을 잊지 않도록 당장 현실에 옮겨놓아야 했다. 그녀는 재빨리 집을 향해 달렸다.

티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겉옷만 벗어 침대 위에 던져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모습을 최대한 비슷하게 묘사하려 노력했다. 신기하게도 평소보다 손이 빨라졌다. 어떤 색을 써야 할지도 곧장 감이 잡혔다. 그녀는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채색에 들어갔다. 백지에 그려진 여왕의 모습에 하나둘 색이 채워졌다. 그녀의 발치에는 색색의 낙엽이 가득했다. 티티는 스탠드 앞에서 완성된 여왕의 그림을 들어 올렸다.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림을 보며 행복해하던 그녀는 혼자서만 그림을 보기 아쉽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부모님이나 회사 동료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었다. 그나마 연락을 주고받는 몇몇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사느라 바빴다. 그들에게 그림을 내밀어보았자 시큰둥한 반응만 오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가입만 하고 방치했던 SNS 계정에 접속했다. 그러고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그림 사진을 찍어 올렸다. 

티티는 휴대폰을 엎어놓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림을 세상에 공개하긴 했지만, 곧장 반응을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놔둔 채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올라왔다.

시간은 몇십 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게시물이 공개되는 SNS의 특성상, 그 정도의 시간이면 반응이 왔을 것이 분명했다. 티티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휴대폰 화면을 켜고 SNS 계정에 접속했다. 그녀가 그린 여왕의 그림에는 세 개의 하트가 찍혀있었다. 그 모습을 본 티티는 갑자기 긴장이 풀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세 개. 세 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티티는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가 SNS에 올린 그림에는 수많은 하트가 찍혔고, 단숨에 인기 게시물이 되었다. SNS를 팔로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정말 멋진 그림이라는 댓글도 몇백 개나 달렸다. 티티는 난생처음 받아보는 관심에 적응이 되지 않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도 행복했다. 

창밖에서 희미한 아침 햇살이 비쳐왔다. 티티는 눈을 떴다. 그녀는 간밤에 꾼 꿈을 떠올리며 휴대폰을 켜고 SNS 계정에 접속했다. 게시물에 찍힌 하트는 두 개 더 늘어 다섯 개가 되어있었다. 

티티는 출근길에 올랐다. 손님이 많은 건 싫지만, 그날은 온종일 바쁘게 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우체국에는 온종일 손님이 많았다. 티티는 정신없이 일했다. 휴대폰을 다시 볼 짬이 난 건 퇴근 이후였지만, 그녀는 시간만 확인하고 화면을 껐다.

평소처럼 공원 바깥쪽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티티는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이전에 본 적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의 연주자는 이전날 들었던 것과는 느낌이 다른 곡조의 곡을 연주했다. 잔잔하면서도 마음에 와닿는, 좋은 곡이었다. 그러나 연주를 듣는 관중은 두어 명 정도가 다였다. 티티는 연주를 들으며 휴대폰을 켜고 SNS에 접속해 보았다. 그림에 눌린 하트는 여전히 다섯 개였다.

티티는 다시 화면을 끄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바이올린 연주 소리는 그녀가 버스에 올라탈 때까지 계속되었다.


Chat GPT로 생성한 삽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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