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와 달빛의 여왕
여왕이 남긴 말은 수수께끼 같았다. 명령인지, 충고인지, 그것도 아니면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말인지 알 수도 없었다. 티티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앞에 두고 여왕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동시에 단호했다. 그녀는 결코 티티를 모자란다고 비웃거나 업신여기지 않았지만, 티티는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다. 여왕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이 꿈만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곤 카페를 나섰다.
늦가을의 저녁은 쌀쌀했다. 티티는 겉옷의 단추를 채웠다. 거리의 불빛은 규칙적이고도 화려했다. 티티는 사람들 사이를 홀로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시간은 어느덧 깊은 밤에 가까워져 있었다. 여왕과 이야기하며 시간이 많이 흐른 모양이었다. 티티는 내키지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본래 잠을 얕게 자는 그녀였지만, 그날만큼은 꿈을 꾸지 않았다.
한동안 티티는 출근을 위한 외출 말고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서였다. 그녀는 여왕과의 만남 후 보름쯤이 지나서야 겨우 자발적으로 바깥에 나갔다. 그마저도 멀리 나가지는 않고 집 근처 산책로로 향했다.
산책로 부근에는 규모가 커다란 고급 카페가 몇 있었다. 주말에 산책로에 가면, 카페에서 음료를 즐기는 손님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티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유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는 사람들 모습을 구경하다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자리에 멈춰 섰다.
찬찬히 시선을 돌리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부’라는 추상적 개념을 현실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돈이 많다는 느낌의 외관을 지닌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유함을 나타내는 듯, 화려하고 빛났다.
티티는 그를 알았다. 목소리를 듣고 돌아본 것도 그의 목소리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달빛의 여왕을 처음 봤을 때 함께 있었던 경제 장관이었다. 티티는 그에게 ‘쓸모없어 보이는 자’라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경제 장관의 표정은 그날과 다름없이 오만했다. 주변에는 지난날 보았던 정치 장관이나 명예장관 같은 다른 장관들도 함께였다. 그들 모두 고귀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경제 장관만큼 눈에 띄는 이는 없었다. 그는 손에 평가표 같은 것을 들고 넘겨보며 말했다.
“이 자는 요즘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예술가야. 예술로 전무후무한 부를 축적하고 있지. 이 정도라면 여왕께서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의 말에, 명예 장관이 고개를 저었다.
“음, 과연 그럴까? 나는 잘 모르겠군. 여왕님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 없으니 말일세. 어떤 해는 자네가 추천한 예술가를 최고로 여기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해도 있지 않나? 몇 해 전을 기억해 보게. 우리 모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각각 원하는 예술가를 세우지 않았나? 그해 여왕님은 우리가 추천한 그 어떤 예술가에게도 작위를 내리시지 않았어.”
명예 장관의 의견을 들은 경제 장관은 미간을 찌푸리며 평가표를 빠르게 넘기다가 손을 멈추었다.
“그렇다면, 이 예술가는 어떤가? 이 자는 내가 조금 전 추천한 자 만큼의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부를 축적하고 있다네. 오롯이 예술 활동만으로 수익을 벌어들이는 데다가 권위 있는 상도 여럿 받았지.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예술가라고 할 수 있어. 이 정도면 자네들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음, 어디 한번 줘 보게.”
경제 장관에게 평가표를 넘겨받은 명예 장관은 은빛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차례대로 평가표를 본 다른 장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고심하면서도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경제 장관의 추천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른 장관들의 태도에서 확신을 유추한 경제 장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면 올해 작위를 받을 예술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자네들 의견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긴 했지만,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다. 다른 장관들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평가표를 덮었다. 그 모습을 본 경제 장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너무 별 볼 일 없는 예술가들이 많지 않은가? 돈도 명예도 없는 자들 말이야. 그런 자들은 세상에 하등 도움이 되는 게 없어. 대중성이 없으니 문화와 산업을 발전시킬 원동력도 되지 못하고,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하니 명예도 없고 정치적인 상황에 이용할 수도 없지. 정말 누더기 같은 자들이야. 본질 자체가 낡고 해어졌기 때문에 어디다 갖다 붙여놔도 제구실을 하지 못해. 괜히 다른 예술가들을 본인의 예술관에 전염시켜 같은 누더기로 만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일세.”
그의 말은 신랄하고 거침이 없었다. 다른 장관들은 그에게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경제 장관은 침묵이 따분했던지 산책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페 근처에 서있던 티티는 그만,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티티를 보자마자 경제 장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티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안 그래도 저기 누더기 같은 자가 지나가는군.”
‘누더기’라는 단어를 들은 티티는 흠칫 놀랐다. 경제 장관은 분명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더기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티티는 몸을 홱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달리는 것은 창피하여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걷다가 카페 부근을 완전히 벗어나자 달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달려서 집까지 갔다.
너무 오랜만에 오래 달린 탓인지, 숨이 차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열이 오른 것은 얼굴뿐이 아니었다. 등에 땀이 나고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얼핏 몸살과 비슷했으나, 몸살과는 달랐다. 티티는 두 팔로 어깨를 끌어안고 벽에 몸을 기대고 섰다.
누더기와 흡사한 자, 누더기 같은 자들. 세상에 하등 도움이 되는 게 없는 존재. 티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이가 들면서 상처에 점점 무뎌진다고 생각했는데 아팠다. 마음이 누더기가 되어버린 것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