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와 달빛의 여왕
티티는 이불 바깥으로 나와 옷을 챙겨입었다.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왔다. 부모님의 방에서는 코고는 소리와 고른 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그녀는 부모님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현관을 열고 문밖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온 그녀는 무작정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남색 하늘에 뜬 초승달은 은백색이었다. 아름답고 선명했다. 달빛은 밤의 도시를 비추었다. 이상하게도 주변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같았다. 거리에 사람이 없어서 더 그런 것도 같았다. 낮은 건물의 지붕도 길 곳곳에 보이는 들풀잎도 은빛으로 빛났다. 밤에 서리가 내리기라도 한 것일까? 달빛과 잘 어울렸다.
걷는 동안 입김이 나왔다. 날씨는 쌀쌀했다. 티티는 걸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를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걸었다. 그녀는 먼저 산책로에 가보았다. 집과 가장 가깝기도 했고 그곳에서 여러 장관을 보았으니 또 다른 이를 만날 수도 있었다. 물론, 내키지는 않았다. 그녀가 경제 장관 때문에 상처받은 곳이 바로 그 장소 아니었는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찾는 것이었다.
티티는 빠르게 걸어 산책로에 도착했다. 이전에 장관들이 여럿 앉아있던 카페의 불은 꺼져있었다. 다른 카페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불빛이 보이는 곳이라곤 카페 근처의 주택가 뿐이었다. 밤도 아니고 새벽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가보는 것이 좋을까? 티티는 여왕을 만났던 카페로 향했다. 그곳은 도심이었기에 집에서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꽤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산책로와 쭉 이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풀 냄새를 맡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도심은 머나먼 곳에 있는 듯 아닌 듯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겨우 도심 근처에 다다른 느낌이 든 건, 인공 호수가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호수를 마주한 티티는 여왕의 행렬을 처음 만났던 때가 기억났다. 왜 잊고 있었을까? 호수 뒤편 산의 등산로를 따라가면 광장이 나왔다. 그곳에는 여왕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광장에 도착하면 바이올린 연주자를 찾지는 못하더라도 무엇인가 정보를 얻을지도 몰랐다. 티티는 기억을 최대한 더듬어 등산로를 따라 걸었다.
겨울의 낙엽은 아주 건조했다. 지난 가을날 밟던 것보다 더욱더 바스락거리고 일부는 질었다. 서리를 맞은 부분인 듯싶었다. 새벽이니 당연할지도 몰랐지만,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가로등 불빛만은 아주 밝았다. 밤하늘의 달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큼이나 환했다. 달과 가로등이 있으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어쩌면 광장에 다시 도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처음에는 한 명인가 싶었으나, 자세히 보니 한 명이 아니었다. 모두 어두운색의 옷을 입어서 그런듯했다. 그들은 모두 키가 크고 종잇장처럼 마른 몸을 지니고 있었다. 얼굴의 색은 은빛 달보다 더 하얗고 창백했다. 그 모습을 본 티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이전에 광장에서 만났던 키 큰 사람들이었다.
키 큰 사람들은 티티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도 그러했고, 다시 만난 순간에도 그러했다. 그들은 티티가 앞에 있다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수군거렸다.
“이 늦은 시간에 여기는 무슨 일일까? 여왕님께서는 이곳에 안 계신대. 만약 계셨더라도 본인을 만나 주시기라도 할 걸로 생각한 것일까?”
“그럴만한 재능도 실력도 없으면서 뻔뻔하긴. 저 사람이 여왕님을 그린 걸 봤는데 도통 못 봐주겠던데?”
“그 정도 실력으로 여왕님을 그리려고 한 것 자체가 모욕 아닌가? 그리고 싶더라도 참았어야지. 다른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고 여왕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어?”
키 큰 사람들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수군거림은 곧, 웅성거림이 되고 웅성거림은 공기 전체에 퍼졌다. 티티는 주변의 공기에 그들의 의견이 가득 차서 자신을 비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등에 식은땀이 나고, 숨을 쉬기 힘들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새벽에 집 밖으로 나와버린 것이 너무나도 후회되었다. 어쩌자고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다리가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당장에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두꺼운 겉옷을 입었음에도 온몸에 오한이 돌기 전, 티티는 그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그녀는 바이올린 연주자를 찾아야 했다. 앞에 선 이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그러했다.
“나도….”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지만, 입안이 바짝 말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서 볼품없었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나도 알아요. 내가 여왕님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예술가가 아니라는 사실은요. 볼품없고 별 볼 일 없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죠. 아니,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지칭할 자격이나 있을까요? 하지만 나는 이곳에 평가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에게 꼭 전해야 할 말도 있어요.”
티티는 말을 마치며 가장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물론, 마주한 사람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잠깐 수군거림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저들끼리 무엇인가 이야기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낮추었다.
“저리 좀 비켜! 그렇게 한곳에 모여서 길을 막고 있으면 우리가 지나갈 수 없잖아? 등산로에 세라도 낸 거야?”
활달한 어조의 목소리가 키 큰 사람들을 나무랐다. 그와 동시에 그들 사이를 헤치고 나오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방울 달린 모자를 쓴, 작은 사람들이었다. 선두에 선 것은 쨍한 붉은 색 모자를 쓴 사람이었다. 작은 사람들은 빨간 모자를 쓴 이를 필두로 큰 사람들을 빙 둘러쌌다. 그러고는 낭랑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너희가 가야 할 길로 가. 괜히 지나가는 사람 괴롭히지 말고!”
그들의 외침은 일순 차가워졌던 공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공기가 바뀌자, 키 큰 사람들은 당황한 듯 휘청거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들은 여전히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작은 사람들에게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작은 사람들은 지지 않고 그들의 말에 대꾸했다. 서로 말다툼을 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어째서인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다른 세상의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어느 한쪽 지지 않고 각자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말하는 것을 멈추고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뉘었다. 키 큰 사람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작은 사람들은 티티를 향해 다가왔다.
“어휴, 지겨운 녀석들. 저 치들은 왜 항상 누군가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일까?”
“항상 가시 돋친 말을 하고 비난에 비난을 더하지. 어떻게 하면 더 상처입힐까 연구하는 것만 같다니까?”
“종잇장 같은 녀석들. 종이에 손이 베이면 얼마나 아픈데! 종이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라고. 하지만 저들의 말은 그저 의견일 뿐이야. 그러니 너무 상처받지 마.”
작은 사람들은 티티를 빙 둘러싸고 저마다 위로의 말을 건넸다. 티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몸이 떨릴 만큼 차가웠던 공기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웠다. 티티는 그들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긴. 그나저나 우리 모두 네가 그린 그림을 봤어.”
“제가 그린 그림을요?”
“그래, 네가 여왕님을 그린 그림들 말이야. SNS에 올린 그림들 말이야.”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대표로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품 안에서 태블릿을 하나 꺼냈다. 일반 사람에게는 보통 크기의 태블릿도 작은 사람들이 들기에는 매우 커서 거의 상반신 만했다. 그녀는 태블릿 PC에 티티의 SNS계정을 띄운 다음, 티티가 그린 여왕의 그림들을 내밀었다.
“이것들 말이야. 비록 우리는 이 기계를 하나밖에 구할 수 없어서 하트를 한 번밖에 누를 수 없었지만. 다들 무척 마음에 들어하고 있어.”
“어떻게 여왕님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그릴 생각을 한 거야? 창의적이면서도 포근한 느낌의 그림이야.”
“나는 네가 그린 가을의 여왕님이 마음에 들어. 이 예쁜 단풍을 봐! 색칠하느라 고생했겠어.”
“단순한 스케치도 느낌이 좋아. 선 하나하나에서 네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보이는 것 같아.”
작은 사람들은 태블릿 PC 앞에 옹기종기 모여 티티의 그림을 구경했다. 그들의 눈이 짙은 밤하늘에 콕콕 박힌 별처럼 빛났다. 티티는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쑥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동시에 슬펐다. 키 큰 사람들이 생각나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경제 장관을 만났던 날이 기억나서였다. 티티는 다소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그런가요? 너무 감사할 따름이지만, 저는 그림 그리는걸 그만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왜? 충분히 좋은데 뭔가 문제라도 있어?”
작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티티는 그들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담담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림을 그린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보인 회의적인 반응, 여왕을 만났을 때 마음속에서 일었던 혼란스러움, 경제장관의 비웃음. 작은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어 주었다. 티티는 이야기를 마치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렇지만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을 때 생각난 사람이 하나 있어요. 저는 그 사람을 찾으러 나온 거예요. 어째서인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는데, 제가 그 사람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