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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티티와 달빛의 여왕

by 로아

티티는 며칠간 아팠다. 이틀 연달아 휴가를 낼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가니 의사는 환절기성 독감이라는 처방과 함께 약을 지어주었다. 약의 색이 알록달록했다. 티티는 약을 먹기 전 어느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진통제를 먹으니 마음의 상처가 무뎌졌다는 내용이었다. 티티는 약을 입안에 넣고 물을 삼켰다. 한숨 자고 나니 몸이 나아졌다. 식사 후 약을 먹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조금씩 더 나아져 주말에는 어느 정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주말 저녁, 그녀는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 TV에서는 토크쇼를 방송하고 있었다. 게스트는 요즘 인기의 정점을 찍고 있는 가수였다. 티티의 아버지가 부러워하던 바로 그 가수이기도 했다. 그는 언변도 좋고 외모도 출중했다. 토크쇼 중에는 집에서 자주 해 먹는 요리를 직접 선보이기도 했는데 진행자와 패널들 모두 맛이 최고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방송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러던 중, 진행자가 가수에게 살짝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곧 있으면 연말 시상식이 있죠. 음악 산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올해의 최고 음반상을 받으실 거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제가 올해의 최고 음반상을요?”

“네, 역대 최고의 가수들 모두 그 상을 받으셨죠. 그 상을 받는다는 건 세상이 인정하는 예술가라는 것을 의미하죠. 단순히 음반이 잘 팔린다는 의미를 넘어서 말이에요.”

“그렇다면 영광이죠. 솔직히 말해서 욕심이 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네요.”

“제가 보기에는 올해의 음반상을 충분히 받고도 남으실 것 같아요. 상을 받으신 후에도 우리 방송에 출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러만 주신다면 달려오고도 남죠.”

“지금도 바쁘신데 올해의 음반상까지 받으시면 더 바빠지셔서 우리 프로그램 출연하는 건 신경도 못 쓰시는 것 아니에요?”

“당치도 않습니다. 오늘 불러주신 것도 영광이었는데 만약 좋은 일이 있다면 오늘보다 더 기쁜 마음으로 방문하겠습니다.”

돌발적인 질문에 관한 가수의 반응은 완벽했다. 겸손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만만하여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티티의 아버지가 말했다.

“지금도 잘 나가는데 올해의 음반상인가 뭔가를 받으면 인기가 더더욱 많아지겠구먼.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어.”

“그것뿐이게요? 연말 기념 콘서트를 한다는데 티켓 가격이 비싼데도 예약을 열자마자 표가 매진돼서 남는 자리가 없대요. 돈방석에 앉고도 남을 거예요.”

티티의 부모님을 한동안 가수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티티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그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약기운에 반쯤 정신을 놓고 있다시피 했는데 갑자기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등을 살짝 쳤다.

“티티, 몸은 좀 괜찮니? 피곤하면 얼른 올라가서 자. 그래야 다시 일하러 나가지.”

“네, 그럴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에 차가 담긴 컵을 든 채로 계단을 오르려는데 낮게 두런거리는 부모님의 대화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아무리 일이 많아도 아프지 않던 애가 갑자기 독감이라니, 아무래도 그림을 다시 그리고 나서 체력이 약해진 것 같죠?”

“그러게 말이야. 마냥 젊지도 않을 텐데 매번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니까 면역력이 떨어져서 저 모양이 되지. 이제 성인이니 제가 하겠다는 일을 두고 뭐라 할 수도 없고 참 고민이야. 아직도 저렇게 현실을 모르나? 취미를 가지더라도 운동이나 자기 개발 같은 현실적인 취미를 가지면 좋을 텐데.”

티티는 얼른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커튼이 살짝 열린 창문 너머로 달이 보였다. 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음악과 그림, 분야는 다르지만 두 가지 모두 예술이라면 예술이었다. 그런데 같은 예술을 해도 돈과 명예를 얻으면 부러움의 대상이요, 그렇지 못하면 천덕꾸러기 취급이었다.

만약 그림을 그려서 돈을 많이 벌고 권위 있는 상을 탔어도 이런 취급을 받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티티의 마음에 ‘누더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경제 장관의 냉랭한 얼굴과 비웃음 담긴 어조도 기억났다. 다시 마음이 아팠다. 날카로운 무언가로 상처를 후벼 파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나올 것같았지만, 참았다. 울면 몸도 마음도 더 아플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로 마음을 달래며 잠자리에 들었다.

주말이 지나자, 몸은 그럭저럭 회복되어서 출근할 수 있었다. 아직도 곳곳이 아팠지만, 그녀는 애써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갔다. 며칠 쉬는 동안 기온이 내려가 쌀쌀해졌다. 늦은 가을도 다 지나가고 겨울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티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버스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일상은 여전히 평범하고 반복적이었다. 별다른 의미 없이 지나가는 시간과 언제나 들려오는 동료들의 대화, 사람들의 모습들. 겨울에 접어들며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해가 무척 짧아졌다는 것이었다. 퇴근 시간에는 바깥이 깜깜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지나다녔지만, 하늘의 색은 끝없이 짙어졌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공원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뿐이었다. 잔잔한 선율도 늘어나지 않는 관중의 수도 이전과 같았다. 바이올린 연주자의 안색은 가을보다 늦가을보다 더 창백해진 듯했다. 코와 눈가 주위는 창백한 안색과 반대로 붉은색이었다. 추위 때문인 듯싶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 직장에서 잊고 있던 달빛의 여왕이 생각났다. 여왕이 생각나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림을 그려봤자 남는 것은 상처뿐임에도 그랬다. 새로운 여왕의 모습이 스케치북을 채워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급작스레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 여럿 있다. 연주자의 존재가 그러했다. 12월 초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보이지 않았다. 11월 말, 이르게 눈이 펑펑 내릴 때도 연주를 쉬지 않던 그였다. 퇴근길은 고요해졌다. 티티는 여왕을 떠올리지 않았다. 다른 노래가 들려왔지만, 여왕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었다.

생활은 다시 단조로워졌고 꿈은 잊히는 듯했다. 도시에는 먼지가 많고, 먼지는 손이 닿지 않는 물건에 쌓인다. 색연필과 스케치북에 살짝 먼지가 쌓였다. 연말의 TV 안에서는 올해의 최고 가수와 연기자로 여겨지는 이들이 화려한 모습을 뽐냈다.

밤이 길어졌다. 티티는 점점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다시 만족을 되찾았다. 티티가 쓸모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회사 생활에 집중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꿈을 잊었던 시간으로. 가장 편안한 장소는 이불 속이었다. 그래도 달은 비추었다. 달빛을 닮은 여왕의 모습은 점차 흐릿해졌지만, 그런다고 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티티는 일하고 잤다. 그것이 삶의 전부였다.

아니, 그녀는 깨어났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티티는 시계를 보았다. 열두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열 시에 잠들었으니 두 시간밖에 자지 못한 것이었다. 평소라면 지쳐서 깨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잠을 방해한 달을 바라보았다. 짜증이 나서 인상을 찡그렸다. 눈을 가늘게 뜨자, 달의 표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갑자기 잊고 있었던 여왕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초청하지 않은 손님처럼 들이닥쳤다. 기억의 심술이라거나 일종의 강박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놔두면 다시 사라질 허상이라고 치부했다. 그런데 여왕의 모습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여왕이 떠오른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소중한 것, 내가 잊고 있는 것. 티티는 이불을 어깨에 두르고 침대에 쪼그려 앉았다. 달빛은 그녀의 발치를 비추고 있었다. 침대 보에 인쇄된 작은 별이 눈에 들어왔다. 소중한 것이 기억 날듯 말 듯했다. 달빛을 받은 별의 색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티티의 마음속에 여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티티, 우리들의 곁에는 밤하늘의 별을 세상에 옮겨놓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들을 몰라보지 않도록 주의하렴. 나는 언제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단다.”

우리들 곁의 사람들. 티티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그들의 얼굴이 기억났다. 단지 그뿐이었다. 밤하늘의 별을 세상에 옮겨놓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나지 않았다. 티티는 절망했다. 여왕은 사람을 잘못 본 게 틀림없었다. 누군가에게 의미를 전할 것이었다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여왕을 잊고 싶었다. 애매하고 어설픈 꿈 따위 떠올리지 않고 사는 게 더 마음 편했다. 누구에게도 응원받지 못하는 꿈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게 나았다. 꿈이 없고 단조로운 세계에 사는 것이 맞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잔뜩 지친 몸을 하고서 퇴근하고.

퇴근, 퇴근길. 퇴근길에는 언제나 바이올린의 선율이 들려왔다. 관객이 없어도 항상 같은 모습으로 그곳에 서 있던 연주자. 티티는 창백한 얼굴의 연주자를 기억했다. 연주할 때면 살짝 붉어지던 볼도. 그의 연주를 인식하게 된 이후로 티티는 다시 여왕을 떠올렸다. 잊어버렸던 꿈이 기억났다. 용기 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왕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여왕은 그녀의 부족한 실력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녀를 직접 찾아와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해주었다. 티티는 여왕을 의심했지만, 여왕은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정하고 온화했다.

여왕을 만나게 해준 이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는 저도 모르는 새 티티에게 가장 큰 선물을 전해준 것이다. 하지만 티티는 언제나 그의 연주를 듣고만 있었다. 연주가 좋다고, 선율이 아름답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의미있는 청중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여왕이 말한 이는 그와 같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별이 꿈을 의미한다면, 꿈을 세상에 옮겨놓는 존재. 아니, 만약 그가 여왕이 찾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를 만나야 했다. 찾아야 했다. 그에게 만나서 고맙다고 이야기해야만 했다. 여왕을 만나게 해주어서 고마웠다고.


900_file-XVcVH9d1jDGXdA7QJFPbaR.jpg Chat GPT로 생성한 삽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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