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와 달빛의 여왕
그림을 공개한 이후 티티는 마음이 착 가라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생각만큼 받지 못한다는 건 직접 그린 그림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 같아 울적했다. 이제 성인이니까, 혈기 왕성하면서도 타인의 반응에 쉽사리 상처받는 십 대 소녀가 아니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림을 더 많이 그려서 올려볼까? 요즘 유행하는 그림체와 채색법을 연주해야 할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 인기 있을 법한 것들을 그려 볼까?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든 그녀의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만 마음에 드는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이 원하는 건 고즈넉한 가을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여왕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티티는 그냥 마음을 따르기로 했다. 당장 중요한 건 SNS에서 공감을 얻는 것보다 원하는 이미지를 세상에 내놓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분히 여왕의 모습을 그렸다. 이번에는 단풍이 매달린 나무 아래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여왕과 나무, 단풍을 그리고 채색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다.
티티는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떠올리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완성작 몇몇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그림에 눌리는 하트의 개수는 적으면 열 개 미만, 많으면 열 개를 넘겼다. 숫자라는 건 언제나 신경 쓰이는 법이었지만, 티티는 나름대로 견뎌 나갔다. 숫자 때문에 그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으니까 괜찮았다.
가을은 점점 깊어져 겨울과 맞닿아갔다. 서점의 문구 코너에는 다음 해의 다이어리와 신상품 수첩들이 진열되기 시작했다. 티티는 어느 주말, 살짝 도톰한 코트를 꺼내 입고 서점에 들렀다. 그녀는 새로 나온 책들을 몇 둘러보다가 문구 코너로 다가갔다. 심플하면서도 예쁜 다이어리가 많았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를 하나 집어 들고, 수첩들도 둘러보았다. 수첩의 크기와 재질, 색은 매우 다양했다. 고급스러운 황갈색 내지를 지닌 어떤 수첩은 크기와 재질이 스케치북과 비슷했다. 티티는 그 커다란 수첩도 다이어리와 함께 집었다.
서점에서 만족스러운 쇼핑을 하고 난 후, 그녀는 커피를 마시러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곳은 실내석과 실외석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커다란 접이식 유리문으로 나누어진 터라 내부에 앉아도 바깥 풍경이 잘 내다보였다. 티티는 해가 짧아지는 늦가을이나 겨울에 그 카페에 가서 창밖을 내다보며 음료를 마시는 걸 좋아했다.
그날, 그녀는 연유가 들어가 단맛이 나는 커피와 속에 견과가 들어간 식빵을 주문했다. 카페는 꽤 널찍했음에도 언제나 인기가 많았다. 티티는 창가 자리가 꽉 차서 실망할 뻔하다가 겨우 테이블 하나를 발견하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주문한 음료와 빵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빵을 칼로 먹기 좋게 자르고 커피를 한잔 마시며 바깥을 내다보니, 하늘에 달이 뜬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달이 뜬 부분의 하늘색은 연푸른빛이었고, 빛이 닿지 않는 곳일수록 색이 짙어져서 남청색처럼 보였다. 다소 담백한 맛의 빵과 달콤한 커피는 제법 잘 어울렸다. 저녁으로 부족함 없는 메뉴였다.
달을 바라보며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던 티티는 서점에서 산 수첩이 떠오르자,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로는 외출할 때 대부분 연필과 펜을 들고 다니는 편이었기에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수첩을 펼치고 그 위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 단골 소재는 여전히 달빛의 여왕이었다. 평소에는 여왕을 단독으로 그리거나 자연물을 소재로 한 배경을 그리곤 했는데, 그날의 주제는 조금 더 캐주얼했다. 그녀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여왕의 모습을 그렸다. 새로운 시도였다.
제약을 두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티티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 테이블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일행이 많은 누군가가 의자를 가져가려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든 티티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의자를 빼내어 앉은 존재는 이는 다름 아닌, 달빛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티티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오랜만이구나, 티티.”
“아, 안녕하세요?”
“축제 때 만나고 처음이지, 아마?”
“그, 그런 것 같아요.”
티티는 깜짝 놀란 데다 눈앞에 여왕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러면서도 여왕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건 아닐까 싶어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표정은 온화했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단다.”
“네.”
긴장할 필요 없다는 말에도 티티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여왕에게 물었다.
“저, 그런데 왜 이곳에 오신 건가요?”
“널 만나러 왔지.”
“네? 저를요?”
티티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그럼, 분명 널 만나러 왔어.”
“여왕님처럼 높은 분이 저를 만나러 오실 이유가….”
“높다니, 그렇지 않아. 나는 나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의 친구 같은 존재란다. 그러니 편하게 생각하렴.”
“그래도요. 지난번 행렬에서 본 여왕님은 저와는 다른 존재처럼 보였는걸요.”
“그건 그 자리에 나 말고도 여러 장관이 함께 있었기 때문일 거야. 그들은 내게 언제나 더 여왕다울 것을 요구한단다.”
“여왕다울 것이란 대체 무엇이죠?”
“말로는 체통을 지켜라,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아라 하며 잔소리들을 늘어놓지만, 결국 그들은 내가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단다. 그건 내 의지와 어긋나는걸.”
“그렇군요.”
“어쨌든 티티, 오늘 널 만나러 여기 온 것도 오롯이 내 의지란다. 그러니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도록 하렴.”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오히려 고마워할 쪽은 나인걸? 너는 요즘 내 모습을 아주 아름답게 그려주고 있잖니. 네가 그린 그림들 잘 보고 있단다.”
“제가 그린 그림들을 보셨어요?”
“당연하지. 날 그린 그림인데 어떻게 보지 않을 수 있겠니?”
티티는 여왕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다는 말에 당황하여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다. 꿈에서도 생각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여왕님을 그 정도로밖에 그리지 못해서 부끄러울 따름이에요. 사실은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이 여왕님이 그렇게 초라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돼요. 물론, 그림을 보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요.”
“그렇게 생각하니?”
“네. 전 확실히 실력이 부족해요.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도 많고요.”
티티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깨물었다.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고 나니 마음이 쓰라렸다. 누가 보더라도 초라한 실력을 부풀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여왕을 대면한 것이 어딘가? 그녀가 자신의 그림을 보고 있다고 말해준 것이 어딘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황송한 기분이었다. 티티가 한창 침묵에 잠겨있는데, 여왕이 그녀의 스케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오늘도 날 그리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네, 그랬죠.”
“내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니?”
“맞아요. 아니라고 하고 싶었는데 알아보셨네요. 그림이 너무 격식 없는 느낌이라….”
“그게 다 무슨 상관이니? 난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도 무척 마음에 든단다.”
“억지로 칭찬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건 너무 낙서 같은….”
“티티, 날 보렴.”
티티가 계속 자신을 비하하고 있을 때, 여왕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조금 전과 매우 다른, 단호한 목소리였다. 티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왕은 그녀의 눈동자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부드러웠으나, 왠지 모를 힘을 담고 있기도 했다. 티티는 그 시선에 압도되어 살짝 멍해질 정도였다. 여왕은 티티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 네가 이야기 한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단다. 중요한 건, 네가 그림을 그렸다는 거야. 그리고 즐거워했다는 사실이지.”
“그림을 그리고 즐거워한 거요?”
“그래, 바로 그거야. 원하는 것을 그리고 즐거웠다면 된 거란다.”
“하지만 가족들은 제가 그림 그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아요. 제게 실력이 없다고 말하죠. 그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몰입하는 걸 걱정스러워도 해요. 제가 직장에 소홀할까 봐요. 직장 사람들도 그림 그리는 일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미술을 전공해도 당장 취직할 곳이 없다는 이야기들만 늘어놓아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제가 좋아하는 일이 쓸모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요. 그림을 계속 그려도 되나, 이런 걸로 즐거워해도 되나, 내가 어리석은 건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걸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다 완성된 그림에 관한 공감을 받고 싶어 SNS에 올렸는데 반응마저 별로 없으면 역시, 난 잘못 가고 있는 걸까 하는 확신이 드는 거죠. 그러면서도 좋으니까 포기하지는 못하지만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구나. 네가 많이 힘들어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용기를 내야 했다는 것도 알아. 다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티티, 지금 너를 둘러싼 것들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란다.”
“저를 둘러싼 것들이요?”
“부모님이나 직장 동료들 같은, 네가 세상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의견 말이야. 네 부모님과 직장 동료들은 그들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어. 세상에는 수많은 관점이 존재하는데도 본인들의 관점이 무조건 옳다고만 생각하지. 편협한 시선을 지니게 되면 당장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조금 편해질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보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단다. 그들은 단지 너와 다른 시선을 지녔을 뿐이야. 티티 너도 그들과 다른 시선을 지닌 것이고.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야.”
“그래도 그분들은 계속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할 거예요. 솔직히 그 말에 굴복하지 않을 자신이 없기도 해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다른 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하려면 실력도 키워야 하고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을 만한 그림을 그려야 할 텐데 전 가망이 별로 없는걸요?”
“네 의견에 힘을 더하기 위해 대중성을 얻고 싶은 거로구나. 하지만 인기가 많다고 해서 모두 좋은 예술은 아니며, 인기가 없다고 해서 모두 나쁜 예술도 아니란다. 단지 공감하는 사람의 수가 다를 뿐이야.”
“여왕님의 말씀에 반박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든 크고 많은 것이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당연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나는 네게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야기 해주고 싶구나.”
“직관적으로요?”
“그래, 티티. 세상에는 많은 예술가가 있어. 누구는 세상 사람 누가 보기에도 성공했고, 누구는 이름 몇 글자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무명일 테지. 그런데 세상이 사랑하는 예술가와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단다. 그걸 꼭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여왕은 말을 마치며 부드러운 눈길로 티티를 바라보았다. 여왕의 눈빛에는 그녀를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이 듬뿍 담긴 듯했다. 티티는 과분한 관심과 애정이 고맙기도 하고 송구하기도 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잔뜩 떠오른 심상들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아 괴로웠다.
여왕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 할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카페를 나서기 전 티티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티티, 우리들의 곁에는 밤하늘의 별을 세상에 옮겨놓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들을 몰라보지 않도록 주의하렴. 나는 언제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단다.”
그리고 여왕은 카페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