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와 달빛의 여왕
집에 돌아온 티티는 씻자마자 곧장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으니, 축제에서 마주한 행렬의 모습이 떠올랐다. 직접 마주했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달빛의 여왕을 만나다니. 여왕과 눈이 마주치다니. 어쩌면 한눈을 판 사이에 꿈을 꾼 것인지도 몰라. 꿈이 너무 생생해서 현실과 헷갈리는 것일지도 모르지. 티티는 다시 눈을 떴다. 창밖으로 밝은 달이 보였다. 여왕은 분명 달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건 꿈이 아니었어.
티티는 몸을 일으켜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책상 앞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다. 하도 많이 고쳐서 너덜너덜해진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연필을 잡고 그려본 달의 여왕이었다. 여왕의 모습을 직접 마주하고 나니, 완성된 그림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누군가가 스케치북을 펼쳐 보기라도 한다면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을 것같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다시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맞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스케치북을 한 장 넘기고 다시 연필을 잡았다. 직접 본 달빛의 여왕을 그려내고 싶었다.
마음은 항상 저만치 앞서가지만, 손의 움직임과 결과물은 의도를 빗겨나가기 다수였다. 아무리 많은 선을 그어도, 머릿속의 이상을 재현하려 노력해도 스케치북에 옮겨진 건 평범하기에 그지없었다. 티티는 좌절하면서도 계속 여왕의 모습을 그렸다. 종이가 지저분해지면 다음 장을 넘겨 그림을 그렸고, 그 장도 너덜너덜해지면 또 다름 장으로 옮겨갔다. 그러는 새 밤은 점점 깊어졌다. 까만 밤이 남색이 되고, 남색 하늘이 점차 밝은 푸른빛으로 변해갈 때까지 그녀는 연필을 놓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지우개 가루가 너저분하게 쌓였고, 그녀의 손바닥 옆면은 연필심에서 묻어난 흑연으로 까맣게 변했다. 시간을 아무리 쏟아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는 어려웠다. 실망은 반복되었다. 그러다 잔뜩 지친 티티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건, 해가 하늘의 한가운데에 떴을 때였다. 그마저도 자의로 깬 것이 아니라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난 것이었다. 문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방에서 안 나와? 어제 뭘 했기에 아직도 안 일어나는 거니? 아침은 꼭 먹으랬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잖아!”
어머니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방문을 열었다. 티티는 반사적으로 그림을 숨기려다가 스케치북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스케치북을 바라보았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거니?”
티티는 쭈뼛거리며 스케치북을 주워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티, 이전에도 수백 번 말했잖아. 너는 재능이 없다고. 그리고 그런 거 해 봤자 어차피 돈도 안 되고.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려는 거니?”
“그냥 오랜만에….”
“너도 이제 성인이니 뭐라 하기도 민망하지만, 예전처럼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다가는 직장생활을 제대로 못 할 거야. 밤을 꼴딱 새운 것같은데, 몰골이 그게 대체 뭐니?”
티티는 스케치북을 덮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 위에 놓인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는 부스스했고, 밤을 새워서 눈은 퀭했다. 볼에는 거뭇거뭇한 흑연이 묻은 채였는데, 정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씻고 아침 먹으러 갈게요.”
“아침은 무슨, 점심이지.”
어머니는 마뜩잖다는 어투로 혼잣말을 하며 문을 닫았다. 티티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한창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티티에게 뭐라 한 것도 잊은 듯, 토스트 만들기에 한창 열중했다. 달걀을 풀고, 소금과 설탕을 적당히 뿌리고 과일을 썰고, 빵을 구워 잼을 발랐다. 아버지는 식탁 앞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티티는 조용히 아버지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신문 너머로 물었다.
“오늘은 늦게 일어났구나, 티티. 그런데 몰골이 그게 뭐냐? 통 늦잠 잔 사람 같지가 않고 밤을 꼴딱 새운 사람 같구나.”
“밤새 그림을 그렸었나 봐요.”
어머니가 완성된 토스트를 접시에 올리며 말했다. 그 말에 아버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다시 그림을 그린다고?”
티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아버지는 혀를 찼다.
“묵묵히 회사를 잘 다니길래 이제 좀 어른이 되었나 싶었는데 아직도 어릴 적에 즐겨하던 망상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구나. 너도 이미 지겹도록 들었겠지만, 미술은 분명 재능의 영역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사람을 이기지 못해. 게다가 재능 있다는, 날고 기는 애들로 그림 그리는 일로만 먹고사는 건 힘들어.”
“그냥 오랜만에 그림이 그리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뭐,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지. 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는 모습은 별로 보기 좋지 못하구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에 쓸데없이 그림 그리느라 시간 낭비만 하지 않았어도 너는 지금 졸업한 대학보다 훨씬 좋은 대학을 졸업했을 거고, 우체국 직원보다는 배는 더 좋은 직업을 얻었을 거야. 취미든 뭐든 직장생활에는 절대 지장이 없었으면 하는구나.”
티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물자, 너무 익어 퍽퍽해진 노른자가 씹혀 입안이 텁텁했다. 오랜만에 새벽 늦게 잠이 들어서 그런지 학창 시절 들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밥맛이 하나도 없었다. 두툼한 토스트에서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종잇장을 씹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지난밤과 새벽에 그린 그림을 넘겨보다가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니 늦은 오후였다. 오후에는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옷을 갈아입고 외출을 했다. 그녀는 대학가 쪽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줄줄이 늘어선 아파트와 주택가를 지나 대학 부근 번화가에 들어섰다. 티티는 대학교 정문 쪽 정류장에서 내렸다. 주말 저녁인데도 학교에 드나드는 학생이 여럿 보였다. 그곳은 미술로 유명한 대학이었기에 어깨에 화구통을 멘 학생들이 많았다. 티티는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건널목을 건넜다.
정문 바로 맞은편에는 커다란 화방이 하나 있었다. 학교의 개교와 세월을 함께 한 오래된 화방이었다. 그곳에는 초등학생용 미술용품부터 대학생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미술용 재료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티티는 수백 개의 색연필이 꽂혀있는 진열장을 바라보며 색을 골랐다. 다른건 몰라도 여왕의 머리색 만큼은 제대로 표현하고 싶어 연한 노란색과 밝은 레몬색, 황금색 색연필을 뽑아 들고 고심했다. 그러다가 연노랑과 레몬색 사이에 꽂힌 색연필 하나와 황금색 색연필을 골라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티티 씨, 여기서 보네.”
초등학생용 준비물 코너를 지나치려는데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직장 동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조카 준비물을 사려고 나들이를 나왔는데 여기서 다 만나네.”
“그러게요.”
“티티씨도 뭘 좀 샀어?”
“색연필이 필요해서요.”
“그러고 보니 황금색을 골랐네. 티티씨한테도 어린 조카가 있어? 선물해 주려고? 아이들은 금색 은색에 환장하잖아.”
“아니요, 제가 쓰려고 사는 거예요.”
“그래?”
“네. 그럼, 월요일에 봬요.”
티티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색연필을 계산했다. 계산을 마친 다음에는 바쁜 일이라도 있는 양 황급히 화방을 빠져나왔다. 회사 동료들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말에 만나고 싶을 정도로 친밀한 것도 아니었다. 별로 개인적인 이야기는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화방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녁은 음료와 식사를 함께 파는 카페에서 해결하고 잠시 멍을 때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아홉 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스케치북을 펴고 화방에서 사 온 색연필로 여왕의 머리를 칠했다.
티티는 여왕의 머리를 칠하며 생각했다. 달빛의 여왕은 대체 언제부터 그녀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한 것일까? 실제로 만난 것은 저번이 처음인데 어째서 여왕의 모습이 기억 속에 그토록 생생하게 남아있을까?
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왕의 이미지는 아주 자연스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렸던 티티가 붓을 잡고, 신이 나서 마음껏 그림을 그렸던 순간에 여왕은 그녀에게 찾아왔다.
추억은 아름다웠지만, 일과의 대부분을 채우는 건 현실이었다. 주말 내내 부모님은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그녀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프긴 해도, 그런 시선은 이미 겪은 적 있었기에 익숙했다. 익숙한 감정은 그러려니 하며 넘길 수 있었다.
다시 월요일이 되었고, 티티는 피곤한 얼굴로 출근했다. 그림을 그리기 전이든 지금이든 월요일 출근은 언제나 힘들었다. 그녀는 졸린 상태와 각성 된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걸이에 겉옷을 거는데 주말에 만난 직원이 말을 걸었다.
“티티씨, 주말 잘 보냈어?”
“네, 조카를 돌봐주시느라 바쁘셨겠어요.”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그런데 티티 씨, 미술 배웠었어?”
“미술이요?”
“그림 그리려고 색연필 사 간 것 아니었어?”
“그렇긴 하죠. 그런데 미술을 따로 배운 적은 없어요. 그냥….”
“취미 같은 건가? 그렇지?”
“취미에 가깝죠.”
“그래, 미술은 취미로 해야지. 그런 걸 직업으로 하겠다고 나서면 곤란해.”
그녀는 티티 앞에서 한숨을 내쉬고는 첫째 조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첫째 조카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는데,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학비와 재료비가 많이 들어 졸업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다고 했다. 문제는 졸업 후였다. 순수미술을 전공한 첫째 조카는 졸업 후에도 작품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 과정에서 부모님과 큰 갈등을 빚고 있었다.
“졸업을 앞뒀으면 애가 정신을 차릴 때도 됐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는지 모르겠어. 제 딴에는 예술을 하겠답시고 그러는 거겠지만, 가족들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면 어떡해? 아직 세상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거지. 덕분에 우리 언니만 힘들게 됐어. 하고 싶은 거 하게 놔두면 알아서 잘 살겠거니 했는데 돈만 억수로 들어가고 아들은 대학 나와서 백수 되게 생겼고. 어휴.”
그녀가 한숨을 쉬자 막 출근해서 의자를 빼려던 직원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무슨 월요일 아침부터 한숨이야?”
“별건 아니고, 그냥 티티 씨랑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 언니 생각이 나서 그랬어.”
“언니가 왜?”
두 사람은 이제 티티를 놔두고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학에서 예술 쪽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돈은 많이 드는데 졸업 후 마땅히 할 것이 없다는 사실에 동감했다.
“예술이고 뭐고, 그것도 다 젊고 혈기 왕성할 때 꾸는 헛된 꿈이야. 나이 먹고 가정이라도 생겨봐. 아니, 당장 내일 밥 사먹을 돈도 없어 봐. 예술 하겠다는 말이 나오나.”
“그러니까, 아직 입에 뭐가 들어갈 때는 몰라. 꿈을 먹고 산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나 아는 동생 딸은 음악 전공한답시고 유학 갔다 왔는데도 백수야.”
두 사람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본래 남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한동안 같은 주제로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사람들은 모두 꿈을 좇았지만, 백수거나 밥을 굶거나 배고프게 살아갔다.
티티는 계속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한가로운 것 같아도, 아홉 시 가까이 되자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월요일은 역시, 월요일이었다. 업무를 시작하자 옆에서 들려오던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는 잦아들었다. 티티는 정신없이 일했다.
여섯 시를 넘길 때까지 일에 시달리던 티티는 겨우 업무를 마치고 퇴근길에 나섰다. 업무 중에는 바빠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나, 집에 가는 길에 문득 오전에 다른 직원들이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꿈을 좇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맞이한 결과.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도 유학을 다녀오면서까지 공부해도 취직이 되지 않는다. 취직이 되지 않는다는 건, 바꿔 말하면 돈을 벌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돈의 동의어는 생계였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지닌 생각이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이나 부모님의 말씀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술이란 게 돈만 많이 들고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창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데 가치라는 것이 꼭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어야 하는 것일까?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그것만으로 직업을 얻을 수 없다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야만 할까?
티티는 부모님이나 회사 동료들의 의견에 오롯이 공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