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와 달빛의 여왕
사흘 후 밤, 티티는 늦은 밤과 새벽의 경계에 다시 집을 나섰다. 그 날은 달빛이 구름에 가려 지난날 길을 나섰을 때보다 밤이 어둡게 느껴졌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작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작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그들은 작고 귀여운 외양을 지니고 있었으나, 당차고 자기 주장이 확고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상대가 누구든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맞섰다. 그리고 친구라고 생각하는 인물에게는 어떤 도움이든 주려고 애썼다. 티티는 그들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며 좋아하던 모습, 줄지어 앙증맞게 걸어가던 모습, 그럴 때마다 모자에 달린 방울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걸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 보니 오래지 않아 등산로 부근에 도착했다. 달빛은 희미했지만, 달빛을 닮은 가로등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 티티는 등산로에 발을 들였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티티는 혹여 키 큰 사람들을 다시 만날까 싶어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다행히 들려오는 소리는 유쾌한 대화와 왁자한 웃음소리였다. 티티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티티!”
살짝 높은 오르막을 넘자, 작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두에는 빨간 모자를 쓴 작은 사람이, 바로 뒤에는 연노란색 모자를 쓴 작은 사람이 서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사이좋게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등산로에 모습을 보인 건 작은 사람들 뿐이 아니었다. 연노란색 모자를 쓴 사람의 품 안에 작은 개가 한 마리 안겨있었다. 하얗고 털이 복슬하고 눈이 초롱초롱한 강아지였다.
연노란색 모자를 쓴 작은 사람은 티티에게 강아지를 소개해주었다. 강아지의 이름은 ‘흰 눈’으로 포메라니안 종처럼 보였다. 그녀는 작은 손으로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바보 같게도 난 흰 눈 오는 날에 흰 눈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 한참을 울고 있는데 마침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시던 웨이 박사님을 만났지. 박사님은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고는 우리 흰 눈이의 작은 발자국을 확인하시고 찾는 것을 도와주셨어.”
“정말 고마운 분이네요.”
“그렇지? 박사님은 얼핏 보면 괴짜처럼 보이시긴 해도 마음이 참 따뜻한 분이야. 분명 티티 네가 찾는 연주자를 찾는 것도 도와주실 거야.”
함께 귀여운 강아지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니, 이전보다 발자국 연구소에 더욱 빠르게 도착했다. 티티와 작은 사람들은 연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사는 여전히 카운터에 없었다. 티티는 종을 울리자, 이번에는 종소리가 난 지 한참 만에 박사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전날과 달리 조금 지쳐 보이는 것같기도, 살짝 긴장한 것같기도 했다.
“잘못하면 며칠 더 늦어질 뻔했는데 다행히 기한은 맞췄어요.”
“그럼, 바이올린 연주자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신 건가요?”
“아니요. 애석하게도 의뢰하신 내용만으로 찾으시는 인물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실패했어요. 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만들었으니 일단 올라와 보시겠어요?”
티티와 작은 사람들은 박사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박사는 모두를 연구용 책상 앞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갈색 찰고무로 만든 밑창이 놓여있었다.
“아무래도 손님께는 이 물건이 필요할 것같아서 제작해 보았어요.”
“이건 신발 밑창 아닌가요?”
“맞아요, 밑창이죠. 그런데 평범한 밑창은 아니에요. ‘발자국의 기억’을 지닌 밑창이죠.”
“‘발자국의 기억’은 뭐죠?”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단어가 주는 의미 그대로, 직관적으로 이해하시면 되죠. 이 밑창에는 발자국의 기억이 담겨 있어요. 손님이 찾으시는 바이올린 연주자의 발자국이 지녔을 기억 말이에요. 이 밑창을 손님의 신발에 덧대면, 발자국의 본래 주인이 걸음 했을 법한 장소를 유추해서 손님을 데려다줄 겁니다.”
“정말요? 어떻게 이런 물건을 발명하신 거예요?”
“누군가가 남긴 흔적에는 그 사람의 기억이 담겨 있으니까요. 저는 단지 그것을 물질에 적용해 본 것뿐이에요.”
박사가 설명을 마치자, 연두색 모자를 쓴 작은 사람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건넸다.
“이거, 정확도는 높은 물건 맞나요? 만약 정확도가 엉망이라면 티티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몇십 년간 수많은 고객의 의뢰를 받으며 개발해 온 기술을 적용한 거라 걸음 유추에 관한 정확도는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우니까요. 물론 오차범위 내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수치로 말하자면 99.8 퍼센트 정도 된다고 해야 할까요?”
“흠,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네. 90퍼센트 정도 신뢰해 드릴게요.”
“영광이군요.”
박사는 고개를 살짝 숙여 신사적인 인사를 건네고는 티티에게 물었다.
“어때요? 이 밑창을 한번 사용해 보시겠어요? 만약 내키지 않으신다면 사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택은 손님의 결정에 달려있어요.”
티티는 대답을 하기 전, 밑창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밑창은 겉보기에 특별한 느낌이라곤 없었다. 찰고무로 만들어 깨끗하고 튼튼해 보인다는 것뿐, 그걸 신발에 덧댄다고 해서 바이올린 연주자의 발자취를 유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를 찾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때, 티티의 귀에 낑낑거리는 강아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흰 눈이 박사의 다리 쪽으로 가서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박사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 흰 눈의 작은 등을 쓰다듬었다.
순간, 티티의 머릿속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미지가 그림처럼 그려졌다. 하얀 눈밭을 떠도는 흰 눈과 그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작은 강아지를 주인에게 찾아주려 노력하는 박사의 모습이었다. 영영 주인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흰 눈은 결국 주인을 찾았고, 박사에게 여전히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티티의 마음속에 결심이 섰다.
“밑창을 사용해 볼래요. 지금 당장요.”
“결심이 서신 거군요. 그럼, 잠시 이걸 신으시고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을 제게 주세요.”
박사는 티티에게 슬리퍼를 내밀었고, 티티는 신발을 벗어 그에게 건넸다. 박사가 건넨 슬리퍼는 푹신하고 따뜻했다. 티티는 박사가 신발에 밑창을 대는 동안 작은 사람들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붙임성 좋은 흰 눈은 모두가 한곳에 집중하고 있는 순간에도 이곳저곳 잘 돌아다니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작은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옮겨 다니던 흰 눈은 어느덧 티티에게도 다가왔다. 티티는 분홍색 혀를 살짝 빼문 흰 눈을 보며 웃음 짓다가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흰 눈의 털은 아주 가늘고 부드러웠다. 마치 인형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웨이 박사는 매우 숙련된 솜씨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밑창을 덧대는 작업은 완성되었고, 신발의 본래 모양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새 밑창을 덧댄 신발이 새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신발을 다시 티티 앞에 내밀며 말했다.
“신발을 다시 신기 전에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죠.”
“주의할 점이요?”
“네. 손님께서 이 신발을 신게 되면, 그 순간부터 손님의 발은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발자국에 담긴 기억에 따라 움직일 거예요.”
“그럼, 신발이 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말씀이세요?”
“맞아요. 그러니 발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평소 본인이 걷는 속도보다 빠르게 걷게 되더라도 당황하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꼭 기억할게요.”
티티가 주의할 점을 숙지하자, 박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신발은 가게 바깥에서 신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야 길을 더 쉽게 찾을 수 있거든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발을 집어 들었다. 밑창을 덧대서 인지 신발은 평소보다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바이올린 연주자를 찾을 수만 있다면. 티티는 그렇게 생각하며 층계를 내려갔다. 작은 사람들은 차례대로 줄을 지어 그녀를 따라왔다.
가게 앞에 선 티티는 신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신발에 덧댄 발자국의 기억은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게 될까? 그녀는 작은 사람들과 흰 눈에게 인사를 건네고 신발을 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