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자국의 끝

티티와 달빛의 여왕

by 로아

티티가 막 신발을 신었을 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신발은 티티가 발을 내딛기 시작하자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나아가다가 자리에 멈춰 서고 다시 걷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티티는 출발한 지 십 분이 넘도록 발자국 연구소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그녀의 뒤에서 작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신발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발자국에 담긴 기억이 제 작용을 하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그들이 잔뜩 걱정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웨이 박사는 잠잠했다. 그는 가만히 서서 모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티티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앞으로 나아가세요.”

티티는 박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잠잠하면서도 흔들림 없었다.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티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느리게 걷던 티티는 발자국 연구소를 벗어난 이후부터 발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걸음은 건물들이 적어질수록,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주변에 관목과 가로수가 늘어날수록 더 빨라졌다. 발자국 연구소 근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속도였다. 티티는 평소라면 절대 낼 수 없는 속도로 걸으며 수많은 가로수를 지나쳤다. 키 큰 가로수 저 너머로 달이 가려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달은 그렇게 밝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잡히지 않는 달을 작은 주먹으로 쥐어 보려 하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티티는 의문을 떠올리면서도 계속해서 달렸다. 달리고 싶지 않아도 신발 때문에 멈춰 설 수가 없었다. 가로수가 점점 드물게 보였다. 관목은 모습을 감추고 다듬지 않은 풀과 키가 작은 나무들의 모습이 보였다. 겨울 부엉이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이제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신발은 숲과 이어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건조한 겨울바람에 말라버린 나뭇잎이 밟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벼우면서도 슬픈 소리였다. 낙엽은 소리를 내자마자 바스러져 가루처럼 흩어졌다. 달빛은 여전히 오솔길을 비추었기에 티티는 신발에 밟힐 때마다 사라지는 낙엽을 볼 수 있었다. 쓸쓸함이 마음 속을 가득 채웠다.

오솔길에는 낙엽과 솔방울, 나무에서 말라 떨어진 가지뿐이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같은 풍경이 이어질 것도 같았으나, 그러한 풍경은 조금씩 또 바뀌었다. 길이 조금씩 넓어졌다. 낙엽도 점차 많이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삭막하면서도 곳곳이 울퉁불퉁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오르막 곳곳에는 바위가 야트막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바위의 모양은 조금 특이했다. 편평하면서도 폭이 일정해서 꼭 누군가가 시멘트로 빚어놓은 벽처럼 보였다. 바위의 크기는 경사가 심해질수록 조금씩 커졌다. 벽이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바위의 거친 표면에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누군가가 써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본래 그곳에 새겨진 듯 보이기도 했다. 티티는 빠르게 오르막을 넘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몇몇 글귀를 읽어보았다.

‘나는 이 벽을 넘을 수 없어.’

‘이 벽을 넘는다 해도 또 다른 벽에 부딪히고 말 거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나는 여기까지인가 봐.’

그곳에는 자포자기하는 듯한 글귀가 가득했다. 읽으면 힘이 빠지는 것 같다가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떤 고난이 누군가에게 이런 글귀를 적게 하였을까? 이 글귀를 적은 사람들은 지금쯤 괜찮아졌을까? 글귀를 써 내려간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으나 티티는 그들이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하는 좋아하는 일을 지속해도 될까 하는 의문. 바위에 남은 것은 고민하는 어떤 사람들의 감정이었다.

경사를 오를수록 바위 사이의 간격은 계속 좁아졌다. 점점 지나가기 힘들게 느껴지는 와중에도 신발은 앞으로 나아갔다. 커다란 바위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통로를 어떻게든 찾아냈다. 마치 나아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벽처럼 커다란 바위들도, 그곳에 적힌 글귀들도 어느 순간 끝났다. 오르막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오르막을 지나다 보니 숨이 찼다. 티티는 잠시 서서 숨을 고르고 싶었으나 신발은 멈추지 않았다. 평지가 이어졌으나, 바닥은 점점 질퍽해졌다. 어디선가 진한 흙냄새가 났다. 비가 왔을 때나 흙에 물이 섞였을 때 나는 냄새였다. 발은 점점 더 빨라졌다. 티티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길은 미끄럽고 걷는 속도는 여전히 빨랐기에 균형을 잡기에 쉽지 않았다. 티티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위태한 상태에서 질척한 흙에 달라붙은 나뭇잎을 밟았다. 건조한 길 위에 놓인 마른 나뭇잎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지만,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은 너무도 미끄러웠다. 티티는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철벅’하는 소리가 나며 온몸에 진흙이 묻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 바닥을 짚으니, 나뭇가지와 돌에 긁힌 손바닥에서 피가 났다. 신발은 그녀의 상황을 모르는 듯, 계속해서 그녀의 발을 움직였다. 티티는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물 냄새와 흙냄새가 점점 더 진해졌다.

신발은 본연의 의지와 달리 앞으로 잘 나아가지 못했다. 발이 자꾸 땅에 빠졌다. 질척임이 심해졌다. 티티는 주변을 이루는 식물의 생태가 이전과 다름을 알아차렸다. 물이 많은 곳에서 자랄 법한 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종아리까지 자란 누런색의 풀 너머로 흙색의 연못 같은 것이 보였다.

그녀는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늪지대를 떠올렸다. 영상으로는 종종 접했었지만, 늪지대에 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늪지대는 종종 매우 위험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직접 와 보니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땅은 미끄럽고 발은 자꾸 빠지고, 찰박거리는 물 안쪽이 웅덩이처럼 깊은지 아니면 그냥 건너가도 될 정도로 얕은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면, 밤이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흙색의 연못은 사실 물이 아니라 진흙탕이 아닐까? 잘못 발을 디뎠다가는 그대로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티티에 관한 걱정이나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신발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맹목적이라기보다는 절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걸음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물기가 많은 곳으로 갈수록 땅이 질어질 것 같은데도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늪과 점점 가까운 곳으로 갈수록 땅을 딛기 수월했다. 이상했다. 지대가 견고하거나 바닥이 바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지. 여러 생각이 들었으나 밤이 깊어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저 질척이지 않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신발의 속도는 발을 딛기 쉬운 부분에 다다른 이후에는 점점 느려졌다. 발이 빠지는 늪지대에서도 절박하게 움직였던 것을 보면 일부러 속도를 늦추는 것같지는 않았다. 티티는 직감적으로 발자국에 담긴 기억의 여정이 끝나감을 느꼈다.

이렇게 애매한 곳에서 기억이 끝난다고? 이 앞은 늪지대인데? 티티는 당황스러움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이올린 연주자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발자국에 담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곳이 그가 도달한 장소일 것이었다. 더는 앞으로 나아갈 곳이 없었다. 앞에 펼쳐진 건 얼핏 잔잔해 보이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깊은 진흙탕이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티티는 어느덧 발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잠시 쉬어가는 순간일까 싶어 기다려봐도 신발은 미동도 없었다. 바이올린 연주자의 흔적 또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막막하고 답답했다. 긴박함이 지나가고 나니, 진흙에 젖은 바지와 겉옷 때문에 살짝 추웠고, 손바닥의 긁힌 부분은 욱신거렸다. 티티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수면에 비친 달빛 덕에 바닥에 남은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발자국이었다. 정교하게 여럿 찍힌 발자국. 티티는 신발을 한쪽 들어보았다. 바닥에 찍힌 발자국의 모양은 눈앞에 보이는 것과 동일했다. 그녀는 발자국을 눈으로 좇았다. 어디까지 이어질까 싶었으나 발자국은 별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넓은 폭으로 겨우 두 걸음이나 더 갔을까? 그 이후는 늪이었다. 좋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스스로 늪에 들어가 버린 것이 아닐까?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발자국의 기억도 끊겨버렸다. 의문이 진실이 되어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티티는 다리에 힘이 빠져 제자리에 쪼그려 앉고 말았다.

진흙탕의 수면에도 달빛은 비추었다. 건조한 겨울밤의 달은 여전히 밝았다. 애석하게도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이제 그녀는 바이올린 연주자를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여왕에게 그를 소개해 줄 수도 없었다. 왜 소중한 사실은 항상 너무도 늦게 깨닫고 마는 것일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이윽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footprint.jpg Chat GPT로 생성한 삽화입니다


keyword
이전 13화발자국 연구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