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와 달빛의 여왕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것도 모두 다른 사람들의 도움 덕인데 이번에도 보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자신이 그토록 초라하고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하나 혼자서는 할 수도 없고 적절한 시기조차 놓치고 후회하기나 하고. 애초에 이런 일은 자신이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다가가 연주가 정말 좋았다고, 그 덕에 잊었던 꿈이 기억났다는 말 한마디만 했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티티가 쓰라린 자책을 하는 동안, 보그는 몸을 돌려 늪 저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무엇인가를 찾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숙여 바닥을 살폈다. 그는 티티가 바닥을 밟아 막 생긴 발자국 말고 조금 더 오래된 듯한 발자국을 찾아냈다. 그 발자국은 잔풀 너머로 이어진 늪지대 바로 앞에 찍혀있었다. 그 부분의 대지는 단단해서 남아있는 발자국의 형태가 꽤 선명한 편이었다.
보그는 발자국을 보자마자 마음속으로 뭔가 결론을 내린 듯, 갑자기 늪지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티티가 말릴 새도 없었다. 그런 다음, 머리를 살짝 내밀고 앞으로, 더 앞으로 헤엄쳐갔다. 보그는 계속 앞으로 가는가 싶더니, 늪지대 한가운데 쪽에 잠시 멈췄다. 그곳은 작은 섬처럼 풀도 돋아나 있고, 땅도 단단해 보였다. 보그는 그곳에 올라서서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살펴보더니, 다시 늪 저편으로 갔다.
그는 겨우 작고 노란 점으로 보일 때까지 헤엄쳐가, 늪지대 저편에 다다랐다. 보그가 움직이며, 크게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풀 소리 같았다. 그런 소리가 들린 후로는 흙바닥을 무거운 물체로 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철벅거리는 소리가 같이 났다. 티티는 고개를 쭉 빼고 보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살폈다.
무엇을 하는 걸까 싶었는데, 오래지 않아 보그는 늪 저편에서 뭔가를 끌고 천천히 돌아왔다. 그가 끌고 있는 것은 작은 나무배였다. 작다고는 해도 티티와 보그 둘 정도가 올라타기에는 충분했다. 티티는 몸에 묻은 진흙을 털고 바닥으로 올라온 그에게 물었다.
“어디에 다녀온 거야?”
“보다시피 늪 저편이지.”
“배는 왜 끌고 왔어?”
“발자국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있었거든. 바닥에 찍힌 모양을 보면, 꼭 뭔가에 올라타느라 꾹 눌린 것같았어. 이 배를 몰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저기 중간에 있는 마른 땅에 멈춰서서 균형을 한번 잡아줘야 하는데 그곳에도 여기 찍힌 발자국과 같은 발자국이 찍혀있어. 분명 그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사람은 배를 탄 게 분명해.”
보그가 말을 마치려는데 늪지대 주변에서 또 다른 거품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그 위로 노란색 머리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곧이어 하나뿐인 눈이 보이는 것을 보니, 그의 다른 동족들도 깨어난 듯싶었다.
“아무래도 배 끌고 오는 소리가 좀 컸나 보네.”
보그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의 동족들은 이미 잠이 깬 듯 늪지대 위로 몸을 드러내고는 제멋대로 헤엄쳐 다녔다. 보그는 움직이는 동족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더니, 티티에게 얼른 배에 탈 것을 권했다.
“지금 깨어난 녀석들 중에 장난꾸러기는 없는 것 같아. 다들 깨어난 김에 헤엄치는 걸 즐기고 있어. 그러니까 일단 배를 타고 늪 저편으로 가서 바이올린 연주자의 흔적을 또 찾아보자.”
“알겠어.”
티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에 올라탔다. 작은 배는 그녀가 올라타자 기우뚱했지만, 보그가 반대편에 올라타자 균형이 잡힌 듯 수평에 맞게 떴다. 보그는 배 안에 있던 노를 꺼내 바닥을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보그가 노 젓는 모습은 꽤 능숙해 보였음에도 늪지대에서 배를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아보였다. 차라리 손으로 끌고 오는 것이 더 빠를 법했다.
배를 젓는데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어쨌건 배는 강 건너편으로 갔고, 두 사람은 마른 바닥에 무사히 내려설 수 있었다. 티티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그녀의 발자국 모양과 같은 수많은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발자국에서는 어쩐지 모를 다급함이 느껴졌다.
발자국은 커다란 나무가 늘어선 숲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티티는 나무의 높이를 가늠해 보려다가 달과 눈이 마주쳤다. 신기하게 그곳에서 바라보자 달이 아주 가깝고, 밝고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아름다운 은빛의 달은 손을 뻗으면 그대로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티티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어째서 그토록 다급하게 움직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티티가 생각을 더 떠올리기도 전에 신발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그녀는 두 번쯤 앞이나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빠르게 달리며 보그 쪽을 뒤돌아보았다.
“보그, 날 따라와. 신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
보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긴 다리를 움직여 그녀와 비슷한 속도로 달렸다.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며 차가운 바람이 볼에 와닿았다. 신선하면서도 쓸쓸한 겨울의 숲 냄새가 폐에 가득 찼다. 낙엽과 마른 가지의 바스락거림이 귓가에 울렸다. 달리면 달릴수록 달은 더욱 가까워졌다. 아름답고 커다랗게 보였다. 차갑고 도도한 은빛에 금색이 감돌아 따스하면서도 다정했다. 달을 마주할수록 티티의 마음에 여왕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간절한 마음의 티티도, 그녀를 진심으로 도운 보그도 열심히 달렸다. 달리고 달리다가 둘 다 숲이 너무 차서 더는 달릴 수 없을 때 탁 트인 원형의 공간에 다다랐다. 겨울에도 잎사귀가 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인 그 공간은 은색 달이 비추는 빛 때문에 아주 신비롭게 보였다. 티티는 그곳에 오롯이 자신과 달밖에 없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신발은 다시 멈췄다.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달 앞에 선 티티는 갑자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슬픔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북받칠 수 없는 감정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울령 거렸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훌쩍거렸다. 보그는 말없이 팔을 들어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훌쩍임이 다 그치지도 않았는데, 맞은편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자, 티티는 손등에 와닿은 보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보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우리 동족 녀석의 발소리인 것 같아.”
보그의 짐작은 맞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너머로 보이는 것은 노란색 몸통과 커다란 눈이었다. 다만, 다가오는 형체의 눈빛은 탁했다. 그 눈에도 달빛이라는 것이 비추었지만, 도무지 믿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보그를 지나치며 비웃음을 흘렸다.
“보그, 너 또 누군가를 도와줄 모양인 듯싶은데 어차피 다 헛짓거리일 뿐이야. 사라진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못해. 네 녀석의 알량한 선행이 결실을 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넌 날 넘어설 수 없어. 특별히 내 머리를 말이야.”
보그는 티티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동족이 사라져간 쪽을 바라보았지만,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얼른 가보자.”
그저 티티의 귓가에 들릴 정도만 작게 말했을 뿐이었다. 티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발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신발도 다시 움직이지 않게 된 상황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