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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의자

티티와 달빛의 여왕

by 로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공터와 같은 땅. 신발은 미세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어디론가 나아가는 것을 멈추었고, 그곳을 비추는 것은 밝은 달빛뿐이었다. 달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다고 믿어질 정도였다. 달빛이 이렇게 밝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아까 그 녀석 말이야. 나쁜 짓을 일삼는 내 동족 중에서도 가장 머리 좋은 녀석이야. 솔직히 난 그 녀석의 꾀를 따라갈 자신은 없어. 바이올린 연주자의 길을 잃게 한 것도, 발자국과 그곳에 담긴 기억을 다 지워버린 것도 그 녀석일 거야.”

보그의 말에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 무력했다. 달빛이 이렇게 밝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오히려 달이 더 아름다워서 무력함이 배가되었다. 주위가 어두웠다면,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고 세상이 온통 어둡다면 차라리 덜 실망스러웠을 텐데. 티티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멀리 돌이켜보지 않아도 삶의 많은 순간은 체념과 맞닿아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무작정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대학에 다니면서도 내게도 한 번쯤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지루하고 반복적인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이런 삶을 지속하지는 않을 거라고 존재하지도 않은 희망을 지녔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 지금도 그랬다. 희망이 존재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언제부터 맑고 파란 하늘을 보며 출근하고 퇴근하는 대신 바닥을 보며 걸었다. 아스팔트와 보도 블럭에는 누군가가 버린 담배꽁초, 뱉어놓은 침과 껌, 자잘한 쓰레기, 거리를 지나쳐가는 동물들의 배설물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희망이 없었다. 하지만 익숙했다. 하늘을 보는 것보다 밝은 달을 보는 것보다 시선을 아래에 두고 걷는 것이 편했다. 아주 가끔 예쁜 들꽃을 발견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미래를 남기겠다고 퍼져나가던 민들레꽃을 발견하기도 했다. 티티의 시선은 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깨끗한 산속의 바닥에는 더러운 배설물이나 쓰레기는 없었다. 바닥에는 흙과 돌, 마른 풀, 낙엽만이 가득했다. 달빛이 어두운 밤에 불을 켜 놓은 것처럼 밝았기에 숲속의 모든 것들이 명확하게 보였다. 시야는 점점 넓어졌다. 처음에는 눈앞만을 보았는데, 저 멀리 나무 밑도 보이고 저 멀리 말라버린 키 큰 풀도 보이고 또 저 멀리 암벽 밑 작은 돌들이 가득한 곳도 보였다. 모든 것은 각자의 존재감을 뽐냈다. 마른 낙엽 하나조차도 의미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본래 아주 중요한 존재였으나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못했던 것처럼. 티티는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바닥에 놓인 요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달빛은 그 모든 것들을 공평하게 비추고 있었다.

공평하게. 편견 없이 모든 것을 눈에 담던 티티는 숲속의 공터 오른 편의 암벽 근처에서 낯익은 대상을 발견했다. 발자국이었다. 자신이 신은 신발의 밑창과 같은 발자국 무늬였다. 그녀는 발자국이 다른 대상 때문에 눈에 띄지 않게 되기 전 암벽 쪽으로 달려갔다. 보그도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처음에는 잘못 보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그곳에 찍힌 것은 분명 발자국이었다. 티티는 그 발자국에 신발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이 땅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신발은 경쾌하게 바닥을 몇 번인가 더 치더니 그녀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그녀와 보그는 신발에 몸을 맡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가 암벽 사이에 있었다. 티티와 보그는 차례로 그곳을 따라 걸었다. 암벽 사이의 길은 어느 동굴로 이어졌다. 입구가 크지 않고 안이 어두운 동굴이었다. 동굴의 어둠은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안에 들어가면 깊고 깊은 어둠 아래로 침잠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속에 솟아났다.

어쩌면 저곳은 늪보다 더 깊은 늪일지도 몰라. 티티는 두려웠다. 손에 땀이 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달빛도 와닿지 못하는 곳에 발을 들이다니, 길도 모르면서. 바보같은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녀는 동굴 안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그러한 것인지 달빛은 동굴의 입구를 비추어 주었다. 티티는 그대로 더 앞으로 가려다가 발에 돌이 차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기하게도 돌은 달빛이 비추지 않는 곳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돌을 들어올렸다. 달빛은 아직 동굴에 안쪽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은 티티와 그녀가 든 돌을 비추었다.

달빛을 받은 돌은 조금 전보다 더욱 환하게 빛났다. 빛을 머금기라도 하는 것같았다. 티티는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돌을 들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돌은 계속 반짝였다. 조금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돌의 빛이 반짝이며 다른 곳을 비추었다. 돌이 비춘 곳에도 달빛과 같은 빛이 반사되었다. 빛은 반대편을 비추었고, 그 빛은 또 반대편을 비추었다. 작은 돌에서 시작된 빛이 동굴의 어둠을 서서히 밝혀나갔다. 곧, 동굴은 달빛의 흔적으로 가득찼다.

신발은 천천히 계속 움직였다. 빛나는 돌과 신발이 있으니 이제 더는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티티는 신발이 걸음을 멈출 때까지 보그와 함께 걸었다. 돌의 색 때문에 약간은 푸른 빛의 달빛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보그는 티티 옆에서 걸으며 말을 꺼냈다.

“있잖아, 이 동굴에 와 보니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나.”

“어떤 이야기?”

“예전에는 늪지대가 더욱 넓었었대. 암벽 지대 쪽까지 늪으로 덮여있었다고 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이런저런 지형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좁아졌다고 해.”

“그럼, 예전에는 여기까지 늪이었을 수도 있겠네.”

“아마 그럴 거야. 이 동굴 안에도 흙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있는 게 느껴지거든. 어디선가 찰박거리는 소리도 나고.”

“동굴 안에 호수가 있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늪지대의 흔적이 있을 수도 있을지도 몰라.”

둘은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걸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는 했으나, 다행히 길을 막는 호수나 늪지는 없었다. 길은 어떤 방과 같은 작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둘은 그곳으로 향했다.

막 도달한 공간은 어두웠다. 빛나는 돌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돌은 그곳에서도 제 역할을 다했다. 머금었던 달빛을 반사하여 삭막했던 공간에 아름다운 빛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티티는 발견했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그곳에 앉아있는 바이올린 연주자를. 그는 보기만 해도 차가울 것만 같은 돌의자에 앉아있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정신이 빠진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몸이 늪에 빠지진 않았으나 꼭 늪에 빠져 생명을 빼앗긴 사람 같았다. 남자의 발치에는 바이올린이 버려지듯 엉망으로 놓여있었다.

티티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곤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의자에서 일어서자, 남자의 초점 없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티티는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가요.”


Chat GPT를 이용해 생성한 삽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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