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와 달빛의 여왕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다고요? 어디로?”
“일단 여기서 나가요.”
티티는 긴말 하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어두웠던 동굴 안은 달빛을 머금은 돌 덕분에 이미 환해진 지 오래였다. 바깥으로 나가는 데 어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동굴을 나서니 암벽 사이의 좁은 길이 모두를 조금 힘들게 했으나 그 정도쯤이야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다. 협소하고 살짝 험하긴 했으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그가 앞장을 섰고, 티티가 그 뒤를, 바이올린 연주자는 두 사람을 따랐다. 암벽 사이를 지나자 다시 탁 트인 길이 나왔다. 셋은 차갑고 청량한 겨울밤 공기를 맞으며 숲길을 걸었다. 그러곤 오래지 않아 공터에 도착했다.
공터를 비추는 달은 여전히 밝았다. 달은 세상을 은빛으로, 은빛은 나무와 풀, 돌 고유의 색과 뒤섞여 아름다운 자연의 색으로 빛났다. 티티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아주 오랜만에 뭔가 제대로 된 일을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이 장소, 기억이 나네요. 정신이 없을 때 오긴 했지만, 이곳에서 보는 달은 아름다웠어요. 달이 무척 커서 손을 뻗으면 꼭 가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죠.”
바이올린 연주자는 달을 바라보며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깨에 메고 온 바이올린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바이올린이 들어있었다. 그는 바이올린을 꺼내 끝부분을 턱에 대고 활을 켜기 시작했다.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첫 음은 날카로웠다. 오랜만에 연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차가운 돌의자에 앉아있으면서 모든 것을 잊었었기 때문일까? 들려오는 소리는 이전보다 투박했다. 그래도 그의 연주는 금세 자리를 잡아갔다. 사람들의 퇴근길, 공원에서 들려오던 아름다운 선율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티티는 홀가분하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연주를 들었다.
오랜만에 연주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연주를 들어주는 관객이 있어서 용기가 났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남자는 연달아 몇 곡을 연주했다. 공원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티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연주를 들었다. 보그도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깨를 흔들며 연주를 들었다. 어느 이야기책에 나오는 것만 같은 밤에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연주는 남자가 선율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티티와 보그는 박수를 쳤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는 진심이 깊이 담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깊은 동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늪지대에 도착했던 순간, 모든 것이 끝이 난 것만 같았는데 동굴과 차가운 돌의자는 그보다 더한 좌절을 안겨주었었죠.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평생 기억을 잃은 바보처럼 그곳에 앉아있다가 돌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티티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감사드려야 할 건 저예요.”
“저한테요?”
“네, 연주자님께는 빚이 있어요. 사과해야 할 일도 있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연주자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연주자님을 알고 있었어요. 퇴근 길에 우체국 근처 공원에서 연주하시던 분 맞으시죠?”
“네, 맞아요. 그곳에서 줄곧 연주를 했었죠.”
“저는 연주자님의 연주를 계속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연주에 관한 감상을 표현하지 않았죠. 그저 집에 가기에 바빴어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연주자님께 다가가서 곡이 정말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래 주셨다면 감사했겠지만, 괜찮습니다. 스스로 좋아서 한 연주인데 누군가가 감상을 표현해 주지 않으셨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니까요.”
“아니요, 연주자님은 단순히 노래를 연주하신 게 아니었어요. 전 연주자님의 연주를 듣고 제가 잊고 있었던 것,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것을 되찾았어요.”
“그것이 무엇이죠?”
“달빛의 여왕님이요. 그 아름답고 온화한 여왕님 말이에요. 팍팍하고 지루한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찾아와 소중한 것을 일깨워주는 분이요. 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분을 다시 만났고 포기해 버렸던 꿈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어요.”
“정말요?”
바이올린 연주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티티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요. 연주자님은 어쩌면 제 인생을 바꿨다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이 말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연주자님을 찾았던 거예요.”
티티는 바이올린 연주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때때로 진심이라는 감정은 말을 바깥에 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데가 있는 것일까? 자꾸 고이는 눈물에 시야가 뿌예졌다. 달빛은 눈에 눈물이 고일수록 더욱 밝아졌다. 착각일까? 티티는 다시 눈물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