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와 달빛의 여왕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달빛이 밝아지는 것도 빛이 번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밤에 꾸는 꿈. 마치 그 한가운데 있는 것만 같았다. 눈물이 그치면 꿈에서 깨어날까?
“티티.”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티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부드러운 황금빛과 감미로운 은빛이 그대로 땅에 내려앉은 듯한 사람이 서있었다. 달빛의 여왕이었다. 티티는 너무 놀라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여왕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구나.”
“여왕님?”
여왕은 티티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너는 내가 들려주었던 말을 아주 잘 이해했구나.”
그녀는 말을 마치며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다가갔다. 티티의 눈에 비친 그는 넋이 나가 있었다. 평소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와 달리 긴장이 완전히 풀려서 다른 사람처럼만 보였다. 여왕은 그에게도 티티에게 보여주었던 미소를 건넸다.
여왕의 미소를 본 바이올린 연주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맑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이었지만, 점차 눈물방울이 굵어지며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는 소리죽여 한참을 울었고, 여왕은 그가 마음껏 눈물을 흘리도록 놔두었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입을 연 건, 아직 눈물이 다 마르기 전이었다. 그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직접 절 찾아오시리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거니?”
“그건, 그건….”
남자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주먹을 몇 번이나 꽉 쥐었다 펴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여왕을 바라보았다.
“매일 저녁 하늘에 달이 뜰 때까지 열심히 연주했지만, 한 번도 여왕님을 만나 뵐 수 없었으니까요. 저는, 저는 정말 여왕님께서 저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고 이미 잊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간절해도 제아무리 노력해도 눈에 보이는 결과도 마음 깊이 느껴지는 성취감도 없었습니다. 나의 인생은, 내가 시작한 예술은 이렇게 끝나버리는구나.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구나.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여왕님을 잊고 살아갔습니다. 잊은 순간부터 한 걸음씩 늪에 가까워졌지요. 날 이름 모를 길로 인도한 건 어느 외눈의 길잡이였지만, 모든 기억을 잃고 차가운 돌의자에 앉기로 한 건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티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말로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본래 감정은 언어로 대체하기 힘든 법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확실히 더 그러했다. 남자는 티티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마음속의 모든 응어리가 풀린 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떤 분이 절 찾아와 차가운 돌의자에서 일으켜주었죠. 제 연주를 듣고서 소중한 것이 떠올랐다고, 제게 여왕님을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했어요.”
바이올린 연주자는 말을 마치고 활짝 웃었다. 한 손에는 바이올린을, 다른 손에는 바이올린 활을 든 채.
곧, 하늘의 뜬 달빛이 더욱 밝아졌다. 깊은 밤에도 눈이 부실 수 있는 것이구나, 달빛은 해와는 또 다른 강렬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구나. 티티는 눈물 때문에, 아름다운 빛 때문에 시린 눈을 감았다 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앞의 광경이 달라져 있었다.
달빛의 여왕의 손에는 전에 없던 홀이 들려있었다. 밤하늘처럼 깊고 맑은 남색의 보석이 달린 왕홀이었다. 여왕의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서있었다. 얼굴을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었으나, 티티가 아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제 장관을 비롯한 여러 장관들, 회의적인 목소리를 내며 대화를 나누는 키가 큰 사람들, 손을 들어 티티에게 반가움을 표시하는 작은 사람들까지. 티티는 손을 들어 작은 사람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그런 다음, 다시 시선을 돌려 여왕을 바라보았다.
여왕은 왕홀을 들고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다가갔다. 여왕이 다가오자, 그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왕은 기다란 왕홀을 내밀어 그의 두 어깨를 차례로 두드렸다. 여왕이 왕홀을 거두자, 온 사방에서 탄성이 울려퍼졌다. 티티는 그 모습 하나 하나를 마음속에, 머릿속에 새겼다. 잊을 수 없는 어느 겨울 밤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