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을 꿈꾸다.
엄마 우체국의 장이 바뀌었다. 예전 할아버지 국장님보다 훨씬 젊은이이다.
작은 희망이라도 생기는 거냐고?
사실 나는 이미 공직이 어떤지, 아니 이곳의 문화가 어떤지 조금은 알아버렸다.
공직생활을 20년 이상 한 사람에게 베어있는 공직문화는 너무나 견고하여 이제는 그것을 깨버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공직의 진정한 쓴맛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임을 몰랐다.
보통 보고서를 쓰곤 하는데 그 보고서의 검토과정이 너무나 힘겹다.
내용에 관해, 정말로 중요한 정보에 관해 깐깐한 것은 모두 다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보고서에 대한 줄간격과 글씨체 그리고 칸의 너비에 대해서 최소 10번씩 다시 다시 다시!!!! 를 경험한 후 나는 정말로 한계치가 왔다.
왜 이렇게 어려운 시험을 보고 들어오는지 이해가 안갔다. 한글, 워드와 같은 자격증을 더 많이 따서 들어오면 딱일 것 같다.
이제는 일에 대한 보람도 없다.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국민을 위해??
아니, 여기 사무실에서는 종이님에게 규정에 딱 맞게 예쁜 보고서라는 옷을 입혀주기 위해 일하는 것 같다.
나는 태어나 지금까지 평생 머리만 대면 쿨쿨 자는 천하태평의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25년 인생 처음으로 불면증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가만히 누워서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잔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이놈에 직업은 철밥통이라는 이유로 잘리지도 않고,,'
이 시대에 공무원 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데 그만두는 건 우리 고지식한 엄마가 졸도할 일이다.
정말 답답하다... 가슴이 먹먹하다...
나는 평생 이 일을 하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인생에 대한 고뇌에 빠졌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이 청춘 같은 시간은 다 흘러버려 다른 곳에 지원할 스펙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흐릿하게나마 적성을 찾아본다.
'나는 사무직은 아닌 거 같다. 게다가 공직은 정말 더더욱 안 맞는 거 같다.. 휴..'
.. 누군가는 이런 나를 불만이 많다고 욕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하지만 꼰대문화, 무사안일, 쓸데없는 일 만들기가 난무한 이곳이 정말 모두 다 싫었다.
주말이면 술친구를 만나 술이나 진탕 마시게 되었다.
내 술친구 10년 지기 친구 댕이가 말한다..
"웬일이니... 얼굴에 그늘이 잔뜩 졌다."
댕이는 말로만 듣던 그늘진 얼굴을 친구인 나에게서 보았단다....
휴...
또르르 한잔 두 잔, 잔 비우는 속도만 빨라졌다.
그렇다. 시험공부할 때는 합격만 하면 내 인생 탄탄대로 모든 것이 훌훌 풀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인생 최고로 싱그러울 나이에 갓핀 얼굴에 오물을 뿌려가면서도 그 굴을 파고 나왔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아니 그 착각 속에 빠졌으니 그렇게 잠도 안 자고 죽어라 공부만 했지...
허나 수험기간의 고통은 인생의 역경이라 말할 거리도 되지 않았다. 살아가면서 넘어야 할 산이 몇 개인진 몰라도 공무원시험은 그저 첫 번째 동네 산을 넘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머라고..... 이걸 거머쥐기 힘들었다고 때려 치치도 못하고 이렇게 마음 골아가며 참고 살아야 할까..
다시 사회로 나가면 정말 굶어 죽을까?’
사람들은 이 밥통을 걷어차면 가난뱅이로 힘겹게 살다 평생 관둔 것을 후회하며 살 것이라고 말한다..
적성 따위는 복에 겨운 소리라고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말만 한다.
또 한잔..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름 입학 초 봄날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옛 남자친구가 떠오른다.
그리고 잠시나마 미팅자리에서 만났던 자칭 공대킹카라 불리던 오빠가 마음을 고백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인생을 달콤하게 장식할 솜사탕 같은 그 모든 것을 매정하게 뿌리쳤던 그날과,
또 친구들과 웃으며 수업을 들으러 가던 설레는 날들이 오버랩 되어 머릿속을 지나간다.
모든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꿈같은 현실을 걷어차고 거지 같은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한 것이 너무 억울했다.
또르르륵.. 또한 잔..
바다와 나비라는 김기림의 시를 아는가?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 밭인가 하고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나는 흰나비였고 공직이라는 바다가 청무 밭인 줄 알았던 것이다.
날개가 절어버린 오늘도 슬픔에 잠을 청해본다.
# 한끝 희망
대학 재학 중 시험합격을 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바로 근무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야말로 희망을 주었다.
바로 학교 졸업을 위한 학업은 휴직사유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인사담당자가 알려주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답답이가 이리 좋은 걸 알려줄 리가 없다.
아니 모를 수도 있다.
나는 모든 인사규정을 다 찾아서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휴직을 신청했다.
과장님이 오케이를 하려는데 답답이가 태클을 걸려고 엉덩이가 들썩, 입이 궁시렁거린다.
태클을 걸 근거가 없다. 완벽한 나의 승리다.
그렇게 나는 당진을 탈출한다.
이게 바로 쇼생크탈출이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퇴직이 아니라 휴직이라는 것이었다.
인생의 구명조끼가 아니라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발목의 쇠사슬이 된 줄도 모른 채,, 그저 기쁨만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