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시골 마을이 모두 그렇겠지만 이곳은 사계절 내내 좋다. 비가 쏟아져 하늘과 바다가 겹쳐 보이는 날, 오늘처럼 사방에 봄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는 날, 그 어느 날에 가도 풍요로운 곳, 사계리.
사계리로 가는 길, 그 풍경들
내가 사는 대정읍에서 사계리로 가는 길, 요즘 같은 날씨에 창 밖으로 눈에 담기는 풍경을 바라보면 싱그러운 초록과 노란 유채꽃, 갖가지 색들이 길 위에서 나풀거린다. 길을 따라가면 ‘까놀레’처럼 둥글고 묵직하게 생긴 산방산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뚝 서 있는 모양새가 사계리 전체를 굽어 살펴보는 듯하다.
산방사와 보문사
불교 신자인 남편을 따라 가끔씩 산방사와 보문사를 가기 위해 사계리에 간다. 산방산 초입에 위엄 있게 자리 잡은 사찰은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가 숨이 찰 때 즈음 우리를 반겨준다. 오른쪽에 위치한 곳이 보문사이고,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 산방사가 있다. 나는 늘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산방사부터 간다. 대웅전에 들어가 절을 올리고 잠시 명상을 하며 번잡한 것들을 비워낸다. 대웅전을 나와 정자에 잠시 앉으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감탄과 함께 남아있던 기우(杞憂)마저 쏟아낸다. 오늘처럼 화창한 날 사계 앞바다에 윤슬이 수놓아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 바다 위의 반짝임은 곧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고 그 빛이 내 마음에 들어올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산방사 정자에 앉아서 찍은 사계 바다
사계의 바다
사계리로 들어서면서부터 반짝이는 모습으로 시선을 잡았던 바다 가까이 가면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다가 아닌 땅이다. 아니, 땅이라기보다 커다란 돌이다. 까맣고 움푹 파인, 넓게 펼쳐진 돌무더기 땅. 이곳의 명칭은 ‘제주 사람 발자국과 동물 발자국 화선 산지’라고 한다. 다시 바라보니 또 생각에 잠긴다. 이 발자국의 주인은 물고기를 잡으러 온 것일까, 나처럼 바다에 시름을 던지고 윤슬을 되받으러 온 것일까.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시선을 바다에 뺏기고, 바다 가까이 가면 땅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사계리의 바다에는 경계선이 있다. 깊은 속내에 있던 것들까지 바다에 쉬어 내보아도 굽이치는 파도가 이내 바닷속 길을 막는다. 일렁이는 물결의 춤이 텅 빈 마음을 채워준다.
바다야, 오늘도 너를 잘 보고 간다.
사계리의 맛과 멋
이토록 경치가 좋다한들 저 바다가 차 한잔 내어줄 수 없고, 산에 핀 꽃들이 밥이 되어 배를 채워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제주의 여신인 설문대 할망이 탐라를 풍요롭게 해 주었듯이 이곳 사계리도 방문하는 이들에게 풍성한 맛과 멋을 내어줄 것이다.
아래는 필자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곳으로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꼭 가는 곳들이다. 처음 사계리를 방문한 사람들은 해안가 근처 식당과 카페를 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디를 가도 맛 좋고, 멋있는 곳들일 테니.
오랑우탄 면사무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로 367-1 1층)
탄탄멘은 원래 국물이 없는 음식이라는 것을 이 식당을 방문하고 나서야 알았다.
이곳은단일메뉴인 ‘오랑우탄 탄탄멘’을 판매하고 있으며, 곁들임 반찬으로 오이무침과 온천계란을 추가할 수 있다. 홍콩에서 탄탄멘을 먹어본 적이 없으므로 ‘authentic’한 맛을 알 수 없으나, 오랜 해외 생활을 했던 남편에게 큰 만족감을 준 음식이니 홍콩 본토의 맛일 것이다. 참, 고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추가하기를 추천한다.
오랑우탄 탄탄멘과 오이무침, 온천계란
럼피 LUMTP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북로 57 1층)
제주에 사는 엄마도 가끔은 도시의 맛이 그립다. 이 식당은 그러한 그리움을 달래준 곳으로 제주생활 3년 동안 방문했던 이탈리안 식당 중에 가장 으뜸이었다. 과장된 표현 아니냐고? 구(舊)청담동 주민이었던 필자의 추천을 믿어보시라. 도산공원 ‘V’ 식당 출신이자 미국에서 오신 이 식당의 셰프는 제주의 신선한 재료들로 이탈리아 본연의 맛을 재현한다. 가끔 단골들에 한하여 (메뉴에 없는)손님 취향에 맞는 요리를 제안하기도 한다. 참,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이라면 원하는 염도를 미리 말하는 것이 좋겠다.
가장 최근 럼피LUMTP에서 먹은 음식들
춘미향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로 378)
이곳은 제주 도민들의 추천으로 간 곳이다. 여러 메뉴가 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시키는 메뉴는 “춘미향정식”이다. 빛바랜 스테인리스 스틸 식탁에 제주의 산해진미가 차려지면 밥상이 다채로워진다. 보글보글, 지글지글 소리까지 어우러지니 음식을 먹기 전부터 즐겁다. 전복성게미역국이 푸짐하게 담긴 뚝배기에 숟가락을 넣어 한 술 떠보면, 진한 연녹색의 국물이 향을 그윽하게 내 코 끝으로 보낸다. 한 입 넘기면, 어느새 숟가락은 다시 뚝배기로 향한다.
동남아에서나 볼 법한 모양새를 한 옥돔구이의 살 한점 떼어 소스에 찍어 먹으니 이 것 역시 별미다. 하지만 내 밥그릇을 뚝딱 비우게 만드는 것은 멜조림이다. 칼칼하고 달달한 소스에 다짐육이 들어가 밥과 함께 먹으면 일품이다. 함께 나오는 딱새우장은 내가 먹지 못하는 음식이라 맛을 묘사할 수는 없지만, 남편이 모두 비워내는 것을 보면 분명 맛있음에 틀림없다. 돼지고기 한 점은 말해 뭐 하겠는가, 이곳은 제주도인데.
한 끼 든든하게 잘 먹고 나오니 다시 바다가 보고 싶은 기분이다.
춘미향 정식
이렇게 배부르게 나와서 커피라도 한 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물을 것 같다. 사계리의 웬만한 카페는 다 가본 것 같다. 특히 해안가 쪽은 안 가본 곳이 없다. 어디를 가도 바다가 보이고, 산이 보이니 커피든 차든 다 좋을 것이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주차를 할 자리가 있는 곳에 들어가 보시길.
바쁘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당히 시간이 흘러가는 이곳, 사계리.
맛과 멋으로 가득한 너는 나를 참으로 많이 달래주고 채워주었다. 그곳에서 사계절 내내 쭈그려 앉아 풍요로운 고독을 떨쳐내던 이 아줌마를 너는 기억할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