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겠습니다.
이사 와서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온 가족이 외출 후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얼른 아이들 씻기고 재워야지 생각하며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가다 걸음을 멈췄다. 아이들도 남편도 멈췄다. 마당 한켠에 배추가 쌓여있었다. 김장 담그는 커다란 대야 두 개는 채우고도 남을 양이었다. 김치를 담궈 먹긴 하지만 마트에서 절여진 배추를 사서 양념만 무쳐 먹는 정도였던 나는 산처럼 쌓인 배추의 양에 압도되었다.
우리 집은 일차선 도로가에 있는 이층집으로 담이 낮고 대문이 없다. 오른편으론 옆집 두 채가 나란히 있다. 왼편에는 작은 오솔길이 있고 밭 하나 건너 이웃집이 한 채 있다. 집 뒤편에는 터줏대감 할아버지네 파란 지붕 집, 뒤이어 할머님 한분이 사는 주황 기와집이 있다. 집 앞 도로 건너편엔 건천이 있다. 주위는 과수원과 계절마다 브로콜리, 양배추, 옥수수, 시금치가 재배되는 밭이 있다.
배추를 마당에 누가 두고 갔는지 짐작이 어려웠다. 오른쪽 옆집은 농사를 짓지 않고 뒷집 할아버지도 연세가 많다. 주황 기와집 할머님은 다리가 불편해서 보행보조기를 끌고 다니신다. 이렇게 많은 배추는 도대체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왼편 건넛집일 것 같았다. 얼른 달려가 문 두드려 '배추 두고 가셨죠? 잘 먹을게요' 하고 막 인사 하는데 건넛집 아저씨는 '우리 배추 농사 안 지어요' 하신다. 그러면서 ‘하르방네 텃밭에서 가져가신 게’ 하셨다. ‘네?’ 연세가 많아 허리 굽은 뒷집 할아버지를 떠올린 나는 놀랐다. 겨우 거동하시는데 어떻게?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아저씨는 크게 웃으며 ‘하르방 농사 잘 지어, 저 뒤 트레가 다 하르방네 밭이라’ 했다. 그날은 너무 늦어 다음날 보리빵을 사들고 뒷집엘 갔다.
할아버지는 텃밭에 배추 농사가 잘 돼서 두고 갔다며 ‘보리빵은 무사 사 와서’ 하셨다. 그러고 따라오라고 했다. 오솔길로 오 분여 걸어가니 텃밭이 나왔다. 말이 텃밭이지 백평이 넘는 규모에 배추, 대파, 무, 시금치.. 겨울 채소가 구획별로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채소가 필요하면 가져다 먹으라고 하셨다. 할아버지 덕에 처음 혼자서 많은 양의 배추를 씻고 다듬어 소금에 절여 김치를 담궜다. 김치 한 접시를 들고 갔더니 할아버지는 바쁜데 자꾸 찾아온다고 타박했다. 배추를 시작으로 할아버지는 무 두 포대기, 시금치 한 포대기를 주셨다. 배추를 받을 때도 무와 시금치를 받을 때도 부담스러웠다. 매번 빵을 사들고 가거나 집에 있는 과일을 할아버지댁에 두고 왔다.
계절마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 마당에 풋고추, 깻잎, 양파를 두고 가셨다. 할아버지 따님이 농사짓는 콜라비나 양배추처럼 속이 꽉 차서 무거운 작물은 수확이 끝나면 나와 아이들을 불러 이삭 줍기를 하게 했다. 아이들은 크기가 작거나 상처가 난 채소를 보물찾기 하듯 찾아냈다. 낑낑대며 집으로 들고 와서 물에 씻고 다듬으면서 크고 반듯하지 않아도 다 먹을 수 있다는 걸. 밥상 위 콜라비 장아찌와 양배추찜이 마트에 가서 돈을 주고 사는 물건이 아니라 흙에서 자라는 생명이라는 걸 몸으로 배웠다. 식사 전 '잘 먹겠습니다'를 아이들이 먼저 말하게 되었다.
텃밭 선물에 익숙해진 나는 일층 책상에서 일하다가 할아버지가 부르면 냉큼 커다란 시장바구니를 챙겨 들고 장갑과 호미까지 갖춰 따라나선다. 밭에서 바로 가져온 먹거리로 요리를 하면 땅에 발붙여 사는 일이 실감 난다. 쉽고 빠르게 요리하는 방법을 찾던 나는 시간이 걸려도 천천히 잘 씻어서 뿌리, 껍질을 다 먹을 수 있는 조리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반찬 수가 줄었다. 흙 묻은 시금치를 잘 씻어 참기름에 무쳐만 먹어도 한 끼가 만족스럽다. 할아버지네 무로 담근 깍두기와 깻잎지, 고추장아찌가 냉장고에 있으면 부자가 된 기분이다. 자연스레 밭작물의 수확 시기를 알게 되면서 때마다 할아버지를 은근히 기다린다.
이사 온 지 칠 년이 지났다. 할아버지는 많이 쇠약해지셨다. 올봄부터는 요양보호사가 오전마다 찾아오는 눈치다. 할아버지네 규모 있는 텃밭이 왜소해졌다. 텃밭 쪽으로 산책을 가면 속상한 마음이 들어 다른 길로 돌아 걷는다. 할아버지네 다른 밭들도 휴작 중이다. 할아버지 덕에 오늘의 먹거리를 먹는 기쁨을 알게 되어 매일이 감사했다. 속상하다가도 무심하게 할아버지가 두고 간 양배추를 살짝 데쳐서 된장에 쌈을 싸서 먹으면 배부르고 소화도 잘되었다. 배부르면 날 선 마음이 수그러 들었다.
올해 초 겨우내 보관하던 늙은 호박을 먹고 씨를 마당 담장 밑에 두었는데 싹을 틔웠다. 더워서 입맛 없던 팔월 여린 호박잎을 땄다. 반은 아이들과 먹고 반은 할아버지 댁 평상에 두고 왔는데 드셨을까? 연둣빛 호박잎을 부드럽게 찜기에 쪄서 드시면서 올여름을 느끼셨을까? 여쭤보러 가기 망설여진다. 며칠 전 산책하면서 지나친 할아버지 텃밭에 노각이 황갈색으로 진하게 여물었던데 안 오신다. 노각 철이 지나 우리 집 마당으로 가지가 뻗은 할아버지네 단감이 소담한 주황색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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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zart Sonata for Piano Four-Hands
in C Major, K. 521: II. Andante
(Pf.) Tal & Groethuy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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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