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새로운 선택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3개월 후]
해주가 점차 평범한 일상에 익숙해질 때쯤, 욱의 마감일이 다가왔다.
원고 완료일을 여유 있게 남겨두고 원고를 완성한 욱은 원고를 모두 프린트해서 제본을 뜬 후 해주에게 가져온다.
"오~ 클래식?"
"원고는 이렇게 읽는 맛이 있죠~"
해주는 원고를 다 읽는 동안 자세 한 번 바꾸지 않고 끝까지 읽어 내려간다.
그러고는 미소를 머금고 이환에게 장 욱 작가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예정대로 영화 제작에 투자를 하겠다고 HS필름 이 대표에게 전하도록 지시했다.
약속했던 계약금을 입금하기 위해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 뱅킹으로 욱에게 입금을 마친 해주는 장 욱과의 계약서를 가져와 입금 확인 서명란에 사인을 한다.
갑작스런 계좌 알림에 입금된 계약금을 확인한 욱 또한 사인한다.
"이 계약은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계약은 계약이니까. 내일 이 대표님 만나서 투자 계약만 마치면 영화 제작 들어갈 거야. 그럼 한 1년 안에 후속작 나오겠다~"
"덕분이에요. 해주 씨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도 없었겠죠."
"네가 한 거야. 너의 의지가 아니었으면 내가 아무리 무슨 짓을 한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아무리 내가 악마라도 이미 죽은 자는 살릴 수 없으니까...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
"오늘은 밖에서 밥 먹을까? 뭐 먹을래?"
"음..전 해주 씨 먹고 싶은 걸로 할게요~"
"잔치국수 좋아해?"
"네! 좋아요~"
해주와 욱은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고, 해주가 직접 차를 몰고 호텔을 나선다.
동대문 근처 한 골목으로 들어선 해주의 차량은 골목골목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기에도 오픈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국숫집에 도착한다.
창가에 자리 잡은 두 사람
메뉴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욱
해주는 한쪽 벽에 손글씨로 쓰여 있는 메뉴를 가리킨다.
"여기는 메뉴가 저게 다야. 잔치국수, 칼국수, 수제비, 만둣국"
"아, 그럼 잔치국수로 할게요."
주문을 위해 사장님을 부르는 해주
사장님은 물과 컵을 가져다주며 주문을 받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뭐 드릴까요?"
"좀 바빴어요. 잔치국수 2개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장님은 주방에 주문을 넣고는 밑반찬으로 나오는 단무지와 김치를 작은 종지에 담아 가져다준다.
잠시 후 주문한 잔치국수가 나온다.
"다 먹고 가고 싶은 곳 있는데 같이 갈래요?"
"어디?"
"경복궁이요. 경회루 있는..."
해주는 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잔치국수를 마저 먹는다.
식사를 마친 후 사장님에게 살갑게 인사를 하고 국숫집을 나온 두 사람
이번엔 욱이 운전대를 잡고 경복궁으로 향한다.
근처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돌담길을 따라 정문 매표소까지 걸어간다.
해주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알고 있는 선에서 해설을 한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서북쪽에 위치한 경회루는 연회를 베풀거나 사신을 접대하고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태조 때에 지어지기 시작했으나,
우물을 파고 지금의 모습과 비슷해진 건 태종 12년에 이으러 서다.
이후, 성종 때에 대대적인 중수를 거치면서 돌기둥에 꽃과 용을 새겼고, 임진왜란 때 불탔지만 흥선대원군 때에 다시 지어졌다.
현존하는 단일의 목조 건축물 중 가장 크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단청의 색감이 하나하나 빛났다.
해주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경회루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네요."
경회루 쪽에서 근정전을 바라보면 다른 곳과는 다른 느낌의 광경을 볼 수 있다.
입구 쪽에서 완전 반대편까지 걸어오면 석상과 함께 나루터 같은 계단이 있는데, 이곳에서 배를 띄우곤 했다.
이곳에서 연산군은 연회를 베풀고 놀면서, 전국에서 예쁜 처자들을 모았고, 그들을 흥청이라고 불렀고,
그 흥청과 놀면서 나라가 망하였기에 여기서 흥청망청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
1층은 잔잔한 호수 같은 경회루의 물과 벽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2층은 본격적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복궁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총 3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문을 열고 닫음으로써 공간을 축소할 수도, 확장할 수도 있게 설계되었으며, 문을 활짝 들어 올려 밖에 있는 풍경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선조의 지혜가 담겨 있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북악산이 보이는데 옆을 보면 채경의 사가가 있던 인왕산이 보인다.
"저기가 인왕산이면 어딘가에 사가가 있겠네요..."
"...붉은 치마가 잘은 안 보였겠네..."
인왕산은 단원 김흥도의 '인왕제색도'라는 작품의 모델이 된 산이며, 이곳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이 그림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다.
창을 열어놓아 희미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았고, 물에 햇빛이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것도 두 사람에게 힐링이 되었다.
관람을 끝내고 나오는 두 사람
"고마워...덕분에 뭔가 찝찝했던 마음이 홀가분해졌어..."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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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 당신의 선택을 응원합니다
해주와 욱이 타고 있던 차량은 광화문 방향 경복궁 사거리에 신호 대기 중이며, 해주는 핸드프리로 이환과 통화 중이다.
그때 율곡로 쪽에서 우회전하던 1톤 트럭 화물 차량이 전속력으로 비틀대듯 지그재그로 달려와 해주의 차를 덮쳤다.
'쿵' 하고 엄청난 소리를 내며 두 차량은 충돌하였고, 트럭은 전봇대를 들이받고 나서야 멈춰 섰으며, 해주와 욱이 탄 차량은 보닛이 구겨지고 반파되었다.
두 사람의 의식 불명 상태였고 주변 사람들의 빠른 신고로 5분 만에 구급차가 도착하였고 인근 대학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통화 중이던 이환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갑자기 끊긴 전화에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데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곧장 병원으로 달려단 이환은 두 사람에게 의사들이 달려들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안..돼...안돼...안돼!!!'신', 당신이 이 두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왜!!!도대체 왜!!! 10년이나 남았는데 왜 벌써 데려가려고 해!!!왜!!!)
소리를 지르며 두 사람에게 달려가려는 이환을 남자 간호사들이 막아선다.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야만 했고, 이성을 되찾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해주를 심폐소생술 하던 담당의가 사망선고를 한다.
"지해수 환자. 2023년 05월 31일 15시 44분. 사망하셨습니다."
연이어 장 욱의 담당의도 사망선고를 한다.
"장 욱 환자. 2023년 05월 31일 15시 49분. 사망하셨습니다."
두 사람에게 연결되어있던 심장박동측정기에 표시된 그래프가 일자를 가리키고, '삐' 소리가 이환의 귓가에 울린다.
이환은 한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 있었고, 간호사의 괜찮냐는 물음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 차리자. 두 사람에게 지금은 나밖에 없어...
수습..수습해야해...뭐부터 해야 하지?...)
친절한 간호사의 안내로 장례식장으로 향했고, 두 사람의 시신은 곧장 영안실로 옮겨졌다.
[저승]
두 사람은 함께 차원의 경계선을 통과하여 석민을 인도했던 저승사자를 만났다.
"여기서부터 두 사람은 다른 길로 가야 한다. 49일 뒤에 '신'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욱은 저승사자를 따라 7단계의 지옥을 거치고, 해주는 바로 '신'에게 소환되어 직접 재판을 받게 되었다.
"너무하시네요. 저에게 10년의 기회를 주시는 것처럼 하시더니 고작 3개월이었네요..."
"그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너는 그를 포기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무슨..."
"그는 여기 올라온 이후로 지금까지 구천을 떠돌고 있었다. 그대의 조차처럼 악귀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대를 기다려야 해서 떠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이라도 만나보겠느냐...이것이 그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니라..."
"결국 이렇게 만나게 해 줄 거였으면 왜 악마와 인간 중 선택하라고 그렇게 닦달한 거죠?"
"그것 또한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고, 그 운명은 장 욱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인간은 선택에 의해 운명이 달라질 수 있으나 악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가요? 한 번 죽은 자니까..."
"결정하라..."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겠네요...만날게요..."
'신'이 손짓을 하자 이 역이 해주 앞으로 소환되고 해주의 모습은 죽기 직전 채경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 역의 마지막 임종 직전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해주
"오랜만이구려, 중전..."
"전하..."
"잘 지냈냐고 안부를 전하려 하였으나 중전의 모습이 잘 지낸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구려..."
"궁에서 쫓겨나 가문은 몰살당하고 겨우 조카 하나 끌어안고 살았으나 그마저 순탄치만은 않았사옵나이다..."
"미안하구려... 생전에 한 번이라도 널 지켰어야 했는데...궁에서 중전을 내보내는 것이 유일하게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거늘...
그것마저 중전을 지키는 방법은 아니었소...뒤늦은 후회를 해봤자 남는 건 미련뿐이었소..."
"환생한 이후에도 전하께 아뢰옵고자 한 것이 있었사옵나이다..."
"말해보시오..."
"내관을 통해 보내신 서신으로 전하의 진심을 알 수 있었으나 소자가 궁을 떠나던 날 경회루를 지날 때 전하의 용안을 뵈었사온데
너무도 차가웠던 그 눈빛과 표정을 잊을 수 없었사옵나이다."
"결국 보았구려...미안하오...나약했던 과인을 용서하시오...반정세력의 기세를 꺾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중전을 마주하지 못했으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보내는 것이 아쉬워 몰래 보러 간 것인데...이미 중전을 사가까지 보필하는 시녀상궁이 반정세력이
심어놓은 첩자인 것을 알게 되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과인의 처지가 한심하고 부덕하여 그런..얼굴을 보이고 말았소...
떠나는 날까지 중전을 볼 면목이 없어 마지막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도 자책하며 스스로에게 벌하였소...
숨이 멎고 나서야 중전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여태 구천을 떠나지 못하고 중전을 기다렸소...
이렇게라도 중전을 볼 수 있어서 생전 맺힌 한이 풀리는 건 어쩔 수 없나보오..."
"...소자의 오해를 풀어주셔서 황송하옵나이다, 전하...이제 그만 편히 쉬시옵소서..."
"...무엇이 되었든, 뭘 하였든, 어떻게 살았더라도 과인은 중전의 선택을 응원하오..."
해주는 이 역을 향해 마지막으로 절을 올리고 이 역은 해주에게 목례를 하며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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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사라진 모든 사람들에게…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에게…
이 역의 영혼이 비로소 소멸되고, 다시 해주의 모습으로 돌아온 해주는 '신'의 앞에 소환된다.
욱 또한 '신'의 앞에 소환되어 서 있었고, 반가운 마음에 해주 쪽을 바라본다.
"잘 보내드리고 왔어요?"
"...응..."
"해주씨...무엇이 되더라도, 뭘 하더라도, 어떻게 살더라도 저는 당신의 선택을 응원할게요..."
"장 욱...이승에서 고달팠던 인생 중에 내가 조금이나마 희망 한 줄기가 되었기를...행복 한 줌이 되었기를 바랄게..."
'신'이 손짓을 하자 두 사람은 소멸되어 사라진다.
[이승]
해주와 욱의 빈소가 나란히 마련되어 장례식이 한창이다.
해주의 빈소 앞에 줄지어 세워놓은 근조화환이 눈에 띄는 데에 반해 욱의 빈소 앞에는 이 대표와 이환이 준비한 화환만이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급히 연락을 받고 발인에 맞춰 도착한 해주의 양부모님과 오빠도 슬픔에 젖어 있다.
이환은 두 사람의 장례를 동시에 치르느라 정신이 없지만 경찰에게 인계받은 두 사람의 소지품을 살펴보다가 해주의 핸드폰을 발견했고
전원이 꺼져있었으나 손상이 적어 충전을 하자마자 전원이 켜졌다.
그녀의 메모장을 발견한 이환은 그녀의 오빠에게 잠시 장례를 맡기고 해주의 집으로 향한다.
정 실장이 이걸 보고 있다면 나는 '신'에게 소환된 후겠지?
언제 소환될지 모르니 미리 이렇게 남길 건 남겨야 할 거 같아서...
금고에 다 넣어놨어...
금고 비번- 신채경
그녀의 집 안, 서재로 들어가 금고 앞에 주저앉은 이환은 번호키에 [14870216]을 입력하자 금고문이 열린다.
그 안에는 그녀의 중요 서류들, 통장들, 인감도장 그리고 편지봉투 5장이 있어고, 편지봉투에는 각각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환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봉투만 꺼내고 다시 금고문을 닫아 잠갔다.
10년 넘게 나를 지켜준 정 이환에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가장 먼저 말해주고 싶었던 말은...고마웠어요...
내 비밀도 지켜주고, 나도 지켜줘서...
덕분에 조금은 숨통이 틔였어요...
악마의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리고 받기만 하고 난 해준 게 별로 없어서 미안하네요...
부디 나 없이도 나보다 더 행복하길 위에서 응원할게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PS- 뒷장은 유서..같은 건데...법무팀에게 전해줄래요?
유 언 장
유언자: 지해주
생년월일: 1989년 06월 22일
주소: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전화: 010-
유언사항
1. 첫 번째 통장은 본인의 양어머니 Kelly에게 양도한다.
2. 두 번째 통장은 본인의 양아버지 Paul에게 양도한다.
3. 세 번째 통장은 본인의 양오빠 Tayler에게 양도한다.
4. 네 번째 통장은 본인의 수행비서 정 이환에게 양도한다.
5. 다섯 번째 통장은 장 욱에게 양도한다.
단, 장 욱이 죽는다면 장 욱의 장례 비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장 욱의 이름으로 청소년보호 센터에 기부한다.
6. 여섯 번째 통장은 본인의 장례 비용으로 사용한다.
7. 호텔 경영의 모든 권한을 정 이한에게 양도한다.
또한, 일곱 번째 통장을 호텔 경영하는 데에 사용한다.
8. 본인 소유의 한남동 집은 호텔 법인으로 명의를 변경하며,
호텔 직원들을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
9. 본인 소유의 차량 2대 중 1대는 정 이한에게,
다른 1대는 장 욱에게 양도한다.
10. 여덟 번째 통장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고궁박물관에 기부한다.
이환은 유언장 내용에 따라 다시 금고를 열어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통장과 인감도장을 가지고 장례식장으로 돌아간다.
장례식이 끝나고 해주의 가족들을 해주의 호텔 사무실로 모시고 왔고 유언장은 법무팀에 전달한다.
법무팀에서 대표 변호사가 가족들에게 유언장을 낭독하고, 이환은 가족들에게 편지봉투를 건넨다.
가족들은 각자 편지를 읽으며 오열을 하고 이환은 끝까지 그들 옆을 지킨다.
(사라진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모든 밤들에게...
그대들이 남기고 간 사랑과 마음...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돌아오지 못하는 마음은 오죽할까요...
그대들의 떠나는 마음은 또 오죽할까요...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해준 게 별로 없다 하셨지만 이미 많은 걸 받았는 걸요...
슬퍼하지 말라 하셨지만 조금만 슬퍼할게요...
감사했습니다...이제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