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들렌의 기적은 과거로 통하는 문을 여는 열쇠였지만 폐허가 된 영토를 재건할 청사진은 아니었다. ‘비의지적 기억’이라는 섬광은 잃어버린 낙원의 존재를 증명해주었으나 그 복잡한 지형도와 그 안을 흐르던 사랑이라는 격렬하고 파괴적인 강물의 흐름을 온전히 복원해주지는 못했다. 그의 예술은 이제 방향을 찾았으나 그것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살아있는 현재의 에너지 즉 관찰하고 분석하고 고통받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연료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운명은 그에게 가장 예기치 못한 형태의 화신을 보내주었다. 그의 이름은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였다. 그는 시인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아니었다. 그는 20세기의 새로운 신인 내연기관을 모시는 사제 즉 자동차 운전사였다. 그의 세계는 형이상학적 관념이 아니라 기계의 물리적 법칙과 속도라는 순수한 현상이 지배하는 명료하고 잔혹한 현실이었다.
1907년 여름 카부르에서 마르셀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아고스티넬리를 자동차의 유기적 부속품 정도로 인식했다. 아고스티넬리의 육체는 프루스트와 정반대였다. 해풍과 태양에 그을린 건강한 구릿빛 피부와 노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근육. 그의 눈에는 내성적인 사유의 그림자 대신 외부 세계를 향한 단순하고 직접적인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마르셀은 그를 고용했다. 처음에는 단지 편리한 도구로서였다. 그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아고스티넬리가 자동차를 다루는 모습을 무심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찰의 성격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마르셀의 시선은 이제 운전 기술이 아닌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라는 미지의 존재 자체를 향했다. 그는 자신의 병적인 분석벽을 살아있는 인간에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아고스티넬리는 그에게 완벽한 해석학적 텍스트가 되었다. 레이날도 안과의 사랑이 ‘유사성’에 기반했다면 아고스티넬리를 향한 새로운 감정은 계급과 교양 기질의 모든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거부할 수 없는 인력이었다.
이 지적 매혹이 사랑이라는 결정체로 응고된 것은 어느 늦가을 오후 노르망디의 해안 도로를 질주하던 자동차 안에서였다. 과도한 속도와 흔들림에 마르셀은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은 아고스티넬리의 옆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공포를 잊었다. 그의 얼굴은 폭풍우 속에서 배의 키를 잡은 오디세우스처럼 완전한 집중과 희열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르셀의 눈에 원시적이고 압도적인 남성성의 현현으로 비쳤다. 그때 자동차가 급커브를 돌면서 마르셀의 어깨가 아고스티넬리의 어깨에 잠시 닿았다. 그 접촉을 통해 기계의 진동과 속도의 현기증 자연의 폭력성이 응축된 순수한 ‘생명력’ 그 자체가 그의 신경계로 전달되었다. 죽은 과거의 유령들과 씨름하던 그의 창백한 지성은 이 야만적이고 압도적인 현재의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장 해제되었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영혼의 고양이 아니라 스탕달이 말한 ‘결정 작용’의 가장 극단적이고 병적인 형태였다. 그의 욕망은 아고스티넬리라는 현실 위에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완벽함과 신비로움의 다이아몬드 가루를 덧씌웠다. 이 사랑의 필연적인 귀결은 ‘소유’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었다. 그는 이 살아있는 뮤즈를 영원히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어야만 했다. 그는 부와 사회적 지위를 동원해 아고스티넬리를 자신의 파리 아파트로 불러들였다. 그의 직함은 더 이상 ‘쇼퍼’가 아닌 ‘비서’가 되었다.
이것은 피그말리온 신화의 뒤틀린 재현이었다. 마르셀은 살아있는 인간 아고스티넬리를 자신의 욕망이 투사된 완벽한 예술 작품 즉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조각상으로 만들려 했다. 그는 아고스티넬리를 외부 세계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그의 모든 자유를 체계적으로 박탈하기 시작했다. 아고스티넬리의 삶은 프루스트의 변덕스러운 일정표에 따라 분 단위로 통제되었다. 허락 없이는 외출할 수도 친구를 만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아파트는 호화로운 감옥 금박을 입힌 새장이 되었다. 아고스티넬리는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영혼은 서서히 질식해갔다. 그는 프루스트의 끊임없는 분석적인 시선 아래 자신의 자발성과 개성을 상실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 등장할 어떤 인물의 살아있는 초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사랑이라는 감옥의 가장 잔인한 고문 도구는 프루스트의 ‘질투’였다. 그의 사랑은 앎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이었기에 그는 결코 아고스티넬리의 내면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아고스티넬리의 미소 침묵 잠든 얼굴은 프루스트가 관찰할 수 있는 현상에 불과했다. 그 너머의 진정한 생각 비밀스러운 과거 다른 욕망이라는 ‘물자체’의 영역은 영원한 미지로 남아있었다. 이 인식론적 불안은 그의 마음속에서 의심이라는 독성의 곰팡이를 배양했다. 그의 질투는 오셀로의 그것처럼 거대하고 형이상학적인 건축물을 쌓아 올렸다. 그는 밤이 되면 잠든 아고스티넬리의 방으로 숨어 들어가 그의 옷 주머니를 뒤지고 숨소리를 들으며 꿈속을 엿보려 했다. 질투의 고통은 그의 육체를 실제로 파괴하는 물리적인 힘이었다.
아고스티넬리는 이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갔다.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창밖의 하늘을 향한 시선이었다. 그는 비행기에 관한 기사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새로운 기계는 그에게 지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프루스트의 분석적이고 집요한 수평적 시선에서 벗어나 신의 시점 즉 모든 것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수직적 자유를 약속하는 기적의 기계였다.
어느 날 밤 프루스트는 아고스티넬리의 옷깃에서 맡았던 낯선 향수 냄새를 배신의 확고한 증거로 삼았다. 그는 아고스티넬리를 종교 재판관처럼 냉혹하고 집요하게 심문했다. “누구를 만났지? 말해. 그 여자의 이름이 뭐지? 아니면 남자였나?” 아고스티넬리는 처음에는 부인했지만 프루스트의 광기 어린 집요함 앞에 결국 침묵했다. 프루스트는 그에게 다가가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은 애무라기보다 소유권을 확인하는 낙인이었다. “너는 나를 떠날 수 없어 알프레드. 결코. 너는 내 것이니까. 너의 육체 너의 시간 너의 생각까지도. 너는 나의 작품의 일부야.” 그 순간 아고스티넬리의 눈에서 완전한 체념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이 한 인간의 광적인 사랑과 위대한 예술의 제물로 바쳐졌음을 깨달았다.
그날 밤 코르크 방 안에서 잠 못 이루던 마르셀은 원고지 위에 새로운 인물의 이름을 적어 넣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알베르틴’이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변덕스러우며 거짓말쟁이인 여인이었다. 그리고 화자인 ‘나’는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의심하며 자신의 아파트에 감금하게 될 운명이었다. 현실의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는 점차 지워지고 소멸해가고 있었다. 그의 영혼의 재를 자양분 삼아 허구의 알베르틴 시모네가 문학이라는 영원의 무대 위에서 불멸의 생명을 얻고 있었다. 사랑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감옥이자 가장 잔인한 형태의 창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