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줄여보자.

그런 믿음으로 오늘도 자기 전에 약봉투를 열어 약을 찾는다

by 모자란한뼘

요즘에도 정신의학과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내가 자주 가는 토요일에는 정말 병원 가득 사람들이 진료를 기다린다. 보통 9시에 진료가 시작인데 8시 반에 도착해도 대기번호가 두 자리를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토요일에는 초진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기존에 내원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매번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아픈 사람이 다양하게도 많구나 싶다.


토요일에는 평일에 오기 힘든 사람들이 모두 모이기에 자칫 조금 늦었다가는 내 앞에 20명이 넘는 대기번호를 받게 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대기시간만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까지 걸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진료가 필요한 사람들 외에 시간에 여유가 없거나 기다리기 싫은 사람들은 단순히 처방전만 받는 사람들도 있다. 특별히 요새 나빠질 것도 나아질 것도 없는 경우에 지금의 현상 유지를 위해서 약을 복용하는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 처방전이라도 진료 없이 받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께서 접수대로 나와서 환자와 간단한 문답을 나눈 뒤에야 처방전을 발급받을 수 있다.


나도 간혹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이 없고, 시간이 부족하다 싶을 때는 그냥 간단히 문답만 하고 처방전만 받고 돌아가기도 했다. 가끔은 병원 방문 며칠 전까지는 또 어둠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듯하다가도, 막상 내원 전날이나 당일이 되면 또 상태가 괜찮아져서는 "오늘 사람도 많아서 굳이 진료는 필요 없겠는데?"라고 생각했다가 돌아가서 후회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우울과 불안이란 것은 왜 이리 일관성도 없이 사람을 흔드는지 오래 지켜봐 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주변 상황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과중한 업무량과 책임감에 눌려왔던 회사일도 꽤나 가벼워졌고,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이어지면서 심리적으로도 많이 안정되었다. 물론 여전히 나 스스로에 대한 불안과 강박, 무기력과 같은 여러 모습들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처음 힘들어서 병원 문턱을 밟기 시작했을 때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안정되고 보람차고 건강한 하루가 이어지다 보면 간혹 이런 착각을 하게 된다.


'어? 나 괜찮아진 것 같은데? 요새 너무 좋은데? 이제 나 다 좋아진 건가?'


그러고 나면 매일 먹던 약을 가끔 깜빡하거나, 약이 다 떨어지고도 바로 병원에 찾아가지 않고 며칠을 더 버티다가 병원을 찾거나 하는 등 정신 관리에 소홀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도 며칠 동안 또 상태가 괜찮으면 그때부터는 진지하게 착각을 하기 시작한다.


'진짜 괜찮아진 것 같아. 이제 약을 끊어도 되겠는데?'


하지만 괜찮은 줄 알았던 바로 그때, 작게 일렁이는 파문에도 나라는 돛단배는 출렁임을 이기지 못하게 뒤집혀 버리고 말았다. 큰일이 아니었는데,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라 생각했음에도 그 미약한 바람에 소스라치게 시려하고, 소소한 빗소리에도 세상 무너질 듯이 놀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괜찮아진 것이 아니었다. 다소 괜찮아져 가는 과정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상태를 과신할 만큼 나아진 것은 또 아니었던 것이다. 그 작은 어려움에도 다시 무너질 정도로 나는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이었을 뿐이었다.


깊은 어둠 속으로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약을 주섬주섬 챙겨 먹거나 병원에 다급히 찾아가게 된다. 그럴 때마다 과연 내가 이 약을 줄여나가고, 끊어나갈 수 있는 날이 오긴 하는 걸까? 하는 불안이 어느새 속 깊이 스며들게 된다. 복용 용량이나 약의 개수는 나날이 늘어나기만 했다. 단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었다. 이 약도 먹어보고, 조금 안 맞는다고 생각 들면 다른 약으로 바꿔서 먹어보기도 했다. 언제쯤이면 나는 여기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렇게 괜찮아질 수 있을까?


한동안 상쾌한 컨디션이었다. 지난 상담도 별 일 없이 평화로웠고, 이번에도 상담 때 특별히 할 말은 없을 것 같았다. 그냥 괜찮고 잘 지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종종 불안에 휩싸이기도 하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무기력하게 무너질 때가 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훨씬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찬찬히 들으시던 선생님께서 싱긋 웃으면서 이야기하셨다.


"이제 약을 조금 줄여볼게요. 아 물론, 아주 조금이에요. 조금씩 천천히 줄여나가 볼 거요"


와, 약을 줄이게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네? 예상치도 못했던 선생님의 말씀에 마음 저 먼 곳에서부터 잔잔한 뿌듯함이 퍼져나갔다. 물론 한 종류의 약의 용량을 아주 조금 줄인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증가만 했던 약용량과 종류가 드디어 처음으로 조금이나마 줄어들게 된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급하지 않게 천천히 조금씩 약들을 줄여나가 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 진료 때는 현재 상태를 정확히 체크하기 위해 심리검사도 다시 한번 해보기로 하였다. 지금 과연 객관적으로 나의 상태는 어떠할까? 나도 많이 궁금해졌다. 아직도 내가 중증 우울증 군에 속해있을까? 아니, 반대로 어느 정도 정상 범주로 돌아와 있을까를 궁금해해야겠지. 나는 분명 나아지고 있으니까. 분명 좋아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약의 작은 용량의 변화가 나에게 큰 영향일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조금씩 약을 줄여나가고 적응해갈 수 있었으면 한다. 그 끝에는 약을 훌훌 털어버리고 하루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시간과 과정 동안 내가 단순히 약물로만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대해 더 고민하고 이해하였기를 바란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되었기를 바란다. 그래서 또 매번 다가올 삶의 어려움과 고난에도 그러려니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믿음으로 오늘도 자기 전에 약봉투를 열어 약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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