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힐 듯 넘쳐나는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자가증식이라도 하는 듯 늘어만 났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인정의 말들과 그로 인해 자라난 자만에 내가 다 해결할 수만 있을 줄 알았으나, 그건 정말이지 단단한 착각이었다. 조직 내에서 인정받은 꽤 괜찮은 인력이라 생각했었으나, 난 그저 열심히 하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저 조금 더 열심히, 오래 일을 해서 나오는 결과를 능력이 빼어난 것이라 착각했을 뿐이었다. 정신을 이미 차렸을 때는 일이라는 물의 수위가 목 끝까지 차올라 숨만 겨우 뻐끔거리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일까?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한동안 고민하였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급류에 잘 못 휩쓸렸을 뿐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잘 못 휩쓸렸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5년을만나온 연인은 함께 바라온 미래에 대한 시선을 점차 어디론가 돌리기 시작하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먼 미래까지 함께 할 것이라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내 실수였을까. 장거리 연애에 지쳐갔을까, 아니면 내가 미래를 함께하기에는 믿음직스럽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자각 못한 큰 잘못을 했었을까? 모른다. 그저 아직은 결혼을 생각하기에 이른 나이었을지도 모르며, 결혼 후 자신의 지역을 떠날 결심이 힘들었을지도 모르며, 조금은 대도시에서 직장인의 삶을 더 즐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일하고 사는 이 곳은 함께할 미래를 그리기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당연하게 생각했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점차 무뎌지며, 어느 순간 끝이 다가오고 있구나를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생활은 점점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겨우내 일어나 낑낑대며 출근을 하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 폭풍 속에 종일 비틀거리다 어느덧 뉘엿이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고, 어둠이 눅눅히 사방에 내리고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진이 온통 빠진 채 비척이며 집에 들어가서는 바로 소파에 드러눕고는 어둑한 조명 아래 자정 넘게까지 핸드폰만을 들어보고 있다가 시간에 밀려 마지못해 씻고 눈을 억지로 감아내었다. 그렇게 하루는 나에게 이겨내야 하는 것이었고, 버티고 살아내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평소와 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마음이 바싹바싹 말라가서는 갈라진 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일까? 오히려 반대로 턱 끝까지 차오른 물결에 까치발을 들고는 겨우 한숨 쉬어내는 것을 느낀 것이 이상한 걸까. 세상 모든 것에 흥미가 떨어지고, 무감각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할 발자국 내딛는 것조차 힘겨워 모두 내려놓고 쓰러지고 싶은 것에 이상한 것을 느끼기 시작한 때였을까. 밥을 먹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출퇴근 중 운전을 하다가도 이유 한 점 없이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지그시 즈려 삼키었던 순간이었을까.
이 모든 것을 너머 내가 스며드는 이상함에 두려움이 불쑥 든 것은 특별한 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 이대로는 정말 큰일이 나겠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어떤 큰일이 날지 상상해보지도 못했다. 그저 마치 팽팽하게 당겨져 금방이라도 팅하고 끊어질 것만 같은 실오라기 같았다. 어느덧 눈을 떠보니 벼랑 끝에서 겨우 버티고 서있다는 사실을 덜컥 깨달아버렸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끝도 없는 어둠 속만이 펼쳐져있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기보다는 한 방울의 식은땀이 또르르 이마 위로 내리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인정해야 했다. 내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나는 내 상태를 돌아볼 용기가 한 줌 피어났다. 아니, 용기라기보다는 살아야겠다는 악다구니라고 하는 게 더 어울렸겠다. 어떻게든 나아보고자 아니 이전 어느 때처럼 평범하게 다시 살아보고자 했다. 정신을 차리자. 내 감정을 냉정히 살펴보고, 일기도 써보고, 이런저런 도움 될 책들도 사서 읽어보자. 그래, 무기력함에 관한 책, 우울에 관한 책, 정신 건강에 대한 책, 내일에 대한 희망을 담은 책 등 공감 가고 내 현재 상태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은 닥치는 대로 사서 읽어보자. 평소에도 책을 좋아했기에 읽는 것 자체로는 즐거웠으나, 문제는 책들이 말하는 훌륭한 내용들이 나에게는 깊게 와닿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책의 내용이 부족했다기보다는 내가 책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나도 몰래 밀어내고 있다는 게 더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나는 충분히 냉소적이었고, 비관적이고 비판적이었다. 글 한 줄에도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부정하고 있었다. 꽤나 못난 모습이었다. 무언가 제대로 알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은 하고 싶었지만, 해결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이 흐르고 한 번 더 인정해야 했다. 내 상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