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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다른 방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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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Nov 25. 2023

다른 방 8

연호는 케이스를 집어넣으며 눈물을 닦았다. 직원들이 소리 내지 않고 걸어 다니는 홀 한가운데서 소희는 연호를 달랬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우리는 너무 어려. 이렇게 성급하게 하면 너도, 나도 후회하게 될 거야. 몇 분이 지나고 연호는 붉은 기가 남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식은 차를 바꿔 주었고 그들은 따뜻해진 차를 천천히 마셨다.

며칠 뒤 연호는 그때 자신이 뭔가에 씌었다고 말했다. 소희와 같이 살고 싶었고, 독립도 하고 싶어서 잠깐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사수가 틈만 나면 당장 프러포즈하라고 부추겨서 넘어간 게 컸다. 요즘 세상에 공무원이면 결혼하기엔 더할 나위 없다고, 지금 당장은 벌이가 적어도 일단 결혼하면 어떻게든 살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에 네, 네, 했을 연호가 소희의 눈앞에 그려졌다.

소희는 연호가 순해서 좋았다. 대학교 때부터 그랬다. 목소리 큰 동기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묵직한 백팩에 전공 서적을 한가득 넣어 다니던 연호. 캠퍼스 벤치에서 소희가 무릎을 베고 잠든 삼십 분 동안 주먹만 쥐었다 펴면서 기다리던 연호. 가끔은 너무 답답하거나 따분해지면 몇몇 동기들의 말을 떠올렸다. 소희야, 이제 보니까 네가 진짜 위너다. 그렇게 자아 없는 남자가 남자친구로 최고더라. 요새 주식 코인 안 하고 맨스플레인 안 하고 여자 친구한테 페미 하냐고 안 물어보는 남자가 어딨니?

소희도 그 말에 동의했다. 연호 같은 남자는 정말 드물었다. 연호를 놓치면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과 그래도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엇갈려 부딪혔다. 

우선 같이 살아 보는 건 어떨까? 어느 날 오전에 청년 주택의 슈퍼 싱글 침대에 누워서 소희는 생각했다. 일상은 공유하고 월세나 생활비도 절약하면서 서류로 얽매여 있지는 않은 상태. 서로 맞춰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감정으로만 묶여서 관계의 긴장감은 유지할 수 있는 생활.

그다음 주에 연호가 캐리어를 끌고 들어왔다. 소파 베드에 깔 이불 패드를 사고 붙박이장 옆에 둘 행거를 조립했던 게 동거의 시작이었다. 

연호는 남자 친구보다 동거인으로서 더 훌륭했다. 이불과 베개만 있으면 소파 베드에서도 잘 잤고 한 군데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대로 반나절은 보내는 식이었다. 소희는 침실에 누워 있다가, 식탁에서 노트북을 하다가, 화장실에 다녀와도 그 자리에 있는 연호를 보면서 화분을 하나 들여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화분은 집안일도 하고 월세와 관리비도 분담했다. 그러면서 전입 신고도 할 수 없고 몰래 살아야 한다는 데 보상 심리를 품지도 않았다. 우리는 정말 잘 맞는 것 같아. 같이 살면서 네가 더 좋아졌어. 소희는 화분에 물을 주는 기분으로 말하곤 했다. 

그래서 연호는 조금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청년 주택 거주 기간이 만료되어 갈 즈음 벨벳 케이스를 아직 갖고 있다는 말을 농담하듯 흘리는 연호에게 소희는 힘주어 말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럼 언제인데? 묻는 말에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소희는 이사를 준비하던 시기에 주임을 달았다. 말이 주임이지 좀 더 오래 다닌 사원이라는 뜻이었다. 대표와 경리 외의 열 명 남짓한 직원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에디터 팀은 중소 규모 도시 시청의 주무관과 소통하며 공식 SNS를 운영하고 디자인 팀은 에디터 팀에서 요청하는 카드 뉴스를 만들거나 계절마다 블로그의 디자인을 교체했다. 모든 직원은 저마다 맡은 도시에 관한 일은 알아서 관리했다. 이 회사에는 직급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표가 입사 순으로 직급을 정리해 제일 오래 다닌 사람은 과장, 그 아래는 대리, 그 아래는 주임, 그 아래는 사원이 되었다. 그중에서 임신하고 떠나서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대표 아래의 직원들은 전부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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