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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고르는 아이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자

by 도럽맘

미국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가장 난감했던 건 도대체 아이에게 무슨 책을 골라줘야 하느냐는 거였다.


아이가 아기였을 땐 말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그림책을 읽어줬다.


그리고 유아기에 접어들면서 모국어를 배워야 할 시기가 되자, 한국어 책을 많이 읽혀줬다.


엘리, 그러니까 한국 이름으로 이래가 세 살 무렵,

우리는 단둘이 1년 반 동안 제주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전까지는 중국에서 자랐고, 세 살이 막 되었을 무렵엔 잠깐 중국 유치원도 다녔다.


그때쯤 엘리에게 백반증 피부질환이 나타나 치료를 위해 급하게 제주에 있는 친정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어린이집에 등록하게 되면서, 상상도 못 했던 ‘한국 육아’가 시작되었다.


그 시절, 아이는 글자를 잘 읽지 못했기 때문에 책을 읽어주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침대 옆에 책을 수북이 쌓아두고, 목이 터져라 매일 밤 읽어줬다.


나는 믿었다.

책을 읽어주는 건, 아이를 품에 가까이 안고 내 숨결과 품결, 그리고 사랑이 담긴 목소리를 전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그래서 정말 열심히, 지치지 않고 읽어줬다.


그러다 엘리가 다섯 살이 되기 두 달 전, 우리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중국어를 막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국으로, 이제 조금 한국어가 익숙해졌는데 미국으로. 뭔가 제대로 언어를 익히지 못한 채 계속 옮겨 다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나를 따라다녔다.


미국에 온 지 반년쯤 되었을 때, 엘리와 본격적으로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이번엔 도서관 책장을 앞에 두고, 도대체 무슨 책을 골라야 할지 막막했던 거다.


아이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부딪쳐 보기로 했다.

무식하게, 직관적으로.


그림체가 마음에 드는 책,

동물을 좋아하니 토끼, 강아지, 고양이 책…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책을 꺼냈다.


AR 레벨? SNS에서 유명한 영어책 시리즈?

그런 건 우리에겐 아무 의미 없었다.


서가에서 마음에 닿는 책을 꺼내 읽고, 마음에 들면 또 읽고 또 읽었다.


엘리는 여전히 영어를 잘 못했고, 학교에서는 이제 막 알파벳과 파닉스를 배우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책 읽기는 여전히 엄마인 내 몫이었지만, 덕분에 나도 영어 공부가 되었고, 매일같이 또 목이 터져라 읽어줬다.


그런데 신기한 건…


어느 순간부터 엘리가 혼자 책을 읽기 시작한 거다.


처음엔 더듬더듬, 나중엔 익숙한 책을 유창하게. 그리고 익숙해진 도서관 안을 스스로 돌아다니며 미리 봐뒀던 책이나 읽고 싶었던 책을 꺼내오기 시작했다.


가끔 가져온 책들을 보면 말이 너무 많고 내용이 엉뚱하거나, 아이 수준보다 어려워 보이는 책도 있었지만

나는 단 한 마디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 책을 단 한 장도 펼치지 않고 반납하게 되더라도, 그건 엘리가 직접 ‘선택’한 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분명 아이만의 어떤 이유가 있었을 테고,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도 나는 늘 말한다.


“네가 골라봐.”


책을 고르는 것도 연습이니까.

끌림으로 시작된 선택도 좋고,

조금 엉뚱해도, 실패해도 괜찮다.

그게 다 과정이니까.


엘리의 시선은 주로 그림이 예쁜 책에 머문다.

색이 예쁘고 표지가 귀여우면 그걸로 충분하단 듯이 조심스럽게 꺼내든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또 아이는 궁금한 책이 있을 때 사서 선생님께 직접 물어보기도 한다.


“토끼 나오는 책 있어요?”


그러면 사서 선생님은 책의 번호를 적어주고 같이 책을 찾아주신다.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는 방법을 터득한 것만으로도 나는 더이상 해줄 게 없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엄마 마음이라는 게 있지. 연령에 맞는 책도 함께 보여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럴 땐 도서관에서 추천하는 책이나 연령대별로 좋은 책 몇 권을 살짝 골라 엘리 책과 함께 같이 대여해 온다.

읽으라고 권하지 않아도 책장 한쪽에 놓아두면, 어느 날 슬며시 펼쳐보는 날이 오더라.


책을 읽는 시간도 물론 좋지만, 요즘 내가 더 소중하게 느끼는 건 책을 고르는 시간이다.


그건 아이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아이의 고른 책을 가방에 넣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아이가 고른 그 책을 믿어주자. 그 선택이 조금 엉뚱하고, 조금 어려워 보여도 괜찮다. 그 안에는 분명, 자라는 마음이 담겨 있을 테니까.


책을 끝까지 안 읽어도 괜찮다.

엄마 눈에는 별로인 책이어도 괜찮다.

그건 내가 고른 책이 아니니까.

아이 스스로 고른, 아주 멋진 첫걸음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제는 엘리의 책 읽기 수준이 엄마인 나를 앞질렀다는 거다. 불과 2년 만에 말이다.


나는 요즘 그 덕분에 영어 공부에 다시 불이 붙었다.

책질질이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아직, 엄마 품에 안겨 사랑이 담긴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걸 엘리는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아이에게 오래오래 책을 읽어주는

그런 엄마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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