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10
*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지명, 인물, 사건 모두 실제와 아무 관련 없습니다
본디 게이 라이프는 익명성에서 진정한 해방감을 맛보는 법
“난 못 해.”
동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 번은 술을 마시다가 커밍아웃이 화제에 올랐다.
대학시절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보낼 편지를 썼는데, 그걸 형이 보게 돼서 억지로 커밍아웃하게 되었다는 나의 흑역사.
“자기는 말할 생각 없어? 우리 형도 우리 관계 아는데, 자기 형도 알면 좋겠다.”
딱히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연애 초기엔 다 있지 않은가.
상대방을 나랑 비슷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같은 거.
하지만 그는 가차 없었다.
“난 못 해.”
딱히 예스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 단호함에 화가 났다.
“그럼 나를 뭐라고 소개할 건데?”
“꼭 소개해야 돼?”
이때부터 목소리가 커졌던 것 같다.
일곱 살이나 어린 남자랑 같이 살게 됐는데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냐!
서로 왕래를 아예 안 할 거냐! 소리쳤더니 난감한 얼굴로, “알아서 할게.”
결국 몽니를 부린 끝에 찾아간 그의 서울 집에서 결혼 타령만 하는 부모님을 만나게 된 거다.
함께 산다는, 목소리가 크고 딱딱한 인상의 둘째 형은 한껏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 신상을 이리저리 캐물었다.
솔직히 질려버렸다.
거봐, 우리 형 무서운 사람 이랬잖아.
이 집에서는 커밍아웃을 한다 해도 내가 대접받을 일이 절대로 없겠다 싶었다.
그걸로 커밍아웃 논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지만, 알 수 없는 찝찝함은 오랫동안 남았다.
“지금이야 뭐든지 좋아 죽겠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겠지만, 나중에 후회해. 만에 하나 한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해 봐. 상대방 형제들에게 살고 있는 집이랑 살림도구 다 뺏기는 것 순식간이다.”
같이 산 지 일 년이 지났을 무렵에 가입한 커플모임에서 다시 커밍아웃 문제가 나왔다.
오랫동안 함께 산 선배들이 충고했다.
“유산, 보험, 은행통장... 진절머리 나게 싸워야 돼.”
“사실 양쪽 가족들이 알고 있어도 소용없지. 법정까지 가면 무조건 지니까. 미리 유언장을 써서 공증을 받아놔야 해. 상속유류분[1]만큼만 가족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지킬 수 있으니까.”
뭐야, 돈 이야기네.
그런 거... 너무 싫어.
비록 ‘취집’이라는 생각이 살짝 들긴 했지만, 그 사람의 돈이 아니라 사랑을 보고 동거를 결심한 거란 말이야.
내 결심과 사랑을 돈으로 측정하는 거, 하지 말아 주세요.
입을 삐죽이며 귀담아듣지 않았다.
다른 쪽 이야기가 더 매력적이었으니까.
“우린 가족들에게 안 알리고 살아요. 그게 더 편하니까요.”
또 다른 커플의 주장이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게 훨씬 이득이다.
배우자로 여겨지지 않으니 굳이 제사나 명절에 가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
당장 실패한 이성애 결혼생활의 전시관이라 할 수 있는 네이트 판같은 커뮤니티에 들어가 봐라.
고부간의 갈등, 책임을 다하지 않는 가족들 때문에 죽겠다는 아우성이 즐비하다.
양쪽 집에서 인정받는다?
그 순간 장인/장모/시어머니/시아버지/동서/제부/처형/처제들이 우르르 생겨버려서, 그 지옥 같은 가족놀이에 동참해야 한다.
그 아비규환에 왜 굳이 들어가려고 하냐.
그래그래, 이 주장이 더 땡겨.
꼬장꼬장해 보이는 그의 부모님과 둘째 형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사람들이 나에게 시집살이를 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만 해도 우울해졌다.
평생 안 보고 살면 그게 행복이지.
덩달아 그와 우리 형과의 관계도 걱정이었다.
동생의 파트너라면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라는 ‘올바른 생각’이 오히려 귀찮은 일을 만들었다.
어찌 됐건 가족이니까 아버지 제사 땐 꼭 참석시키란다.
나도 그 집 제사 안 가는 데 왜! 항변했지만 그건 그 집 사정이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형은 어딘지 모르게 ‘꼰대’ 같은 면이 있었다.
“그 사람이 형보다 네 살이나 많아서 대하기가 좀 그렇지 않아?”
“아무래도 좀 그렇지.”
거봐, 형도 네 살 많은 덩치 큰 제수씨(?)가 부담스럽잖아.
서로 마주치지 않고 사는 게 좋지 않겠냐고 회유해 봤지만,
“어차피 명절에는 그 사람도 자기네 집에서 차례 지내야 하니까 아버지 제사 때만이라도 오라고 해.”
아버지는 이제 아들이 게이란 사실을 알아도 상관없다는 논리였다.
그렇대요, 글쎄. 참 어이가 없어서. 우리 형 오버다 그치? 했는데 웬일인지 그는 좋단다.
이미 알려진 거고, 안전한 범위 안에서라면 뭐가 문제냐는 거였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아버지 제사에 참여했고, 그러다 보니 조금은 친해져 여름휴가 때엔 바다에서 물놀이도 할 겸 우리 집에서 하루 이틀 쉬다 가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너무 친해지면 형수랑 조카들도 우리 둘의 관계를 의심할 수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적극적으로 교류하지 않았다.
본디 게이 라이프는 익명성에서 진정한 해방감을 맛보는 법이다.
가족 역시 적당히 멀어지는 게 편하다.
그 결과 서로의 가족들에게 집안일해주는 꼬붕 같은 애라거나, 푼돈으로 젊은 애 기 빨면서 사는 요괴라고 취급되었지만, 커밍아웃하지 않는 게이커플의 장점이 더 많다고 믿고, 어쩌면 그걸 잘 누려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문득문득 커플 선배들의 말이 떠오르긴 했다.
만약 누구 하나가 잘못된다면... 둘이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유럽여행에서 그 난리를 겪은 후, 난 줄곧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 상속유류분: 현행 상속법상 특정인에게 재산을 모두 주도록 유언장을 작성해도 다른 법정상속인들(보통 부모나 형제)이 일정 비율의 재산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 둘이 함께 재산을 만들었어도 사망하면 파트너 명의의 재산은 당연히 그 가족들에게 상속됨으로 미리미리 서로를 상속인으로 유언장을 써두는 게 좋다. 유언장은 공증을 받아두는 게 행여 있을 소송에서 편리하다. 현재 국회에서 폐지를 논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