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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나날
17화
감정 테트리스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일 공간이 넉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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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담
May 25. 2023
부끄럽지만 최근에서야
테트리스라는
고전 게임의 룰을 알게 되어,
제대로 된 규칙대로
게임을 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로줄을 빈틈없이 채우면
그 줄을 메우고 있던 블록이
깔끔하게 사라진다는
간단한 규칙을 적용해 보니,
마음대로 했을 때와는 다르게
네모난 박스 속에
박혀있던 블록들이
빠르게 깨지고 또다시 채워지는
티키타카가 묘하게 개운했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 하자고 해야만
겨우 했던 게임인지라,
지금까지 룰을 알아야겠다는
의지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룰을 모르고 해도
한두 개쯤 깨지는 블록이
항상 있었기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자만심이 가득해지면서
더더욱 방법을 알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한두 번의 운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더 이상은
나름의 방식이 통하지 않았고,
층층이 쌓여가는 높이에
갈피를 못 잡다가가
결국에는 꼭대기에 맞닿아버려
'게임 오버'라는 문구가 떴다.
회사에서 상사가 멀리서 불러도
"넵!"이라고 자동응답할 정도로
긴장감을 담아 일을 해보지만,
사회 초년생이라 그런지
가끔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믿었던 서류한테
배신감을 느낄 때가 있다.
상사에게 실수를
자백하기까지
충분히 마음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먹기와는 상관없이
상사의 꾸중은 언제 들어도
몸을 무겁게 만드는
타격감이 있다.
평소에 걸음걸이가 빠른 편이라
보통의 퇴근길이었다면
보지 않아도 됐을
낯선 사람들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를 억울함과
실수했다는 쭈굴함에
세상 느릿하게 걷고 있는
다리의 무게감이
그제야 체감이 된다.
집에 도착할 즘이면
냉장고를 열어
음식을 꺼내 먹을 힘조차
없을 것 같아서,
스스로에게 주는
작은 위로랍시고
평소에 좋아하던
에그 마요 샌드위치를 포장했다.
샌드위치를 먹는 순간에는
에그 마요와 잘 어울리는
스위트 어니언 소스 맛에
잠깐 행복하다가도,
혼자 먹는데
괜한 돈을 썼나 싶어져
기분이 더 다운되는 것 같다.
하루가 다 가기 전에
그날에 찾을 수 없었던
긍정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어서,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여러 영화 후보 중
고심해서 고른
영화 한 편을 틀어 본다.
영화 속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했듯
어쩌면 나도 조금은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몽글몽글한 감정이 넘치다가도,
영화의 끝을 알리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
잠시 잊고 있던 답답함이
스멀스멀 올라와
결국 축 처진 어깨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된다.
기분전환을 위해
야심 차게 준비했던
에그 마요 샌드위치와
2시간짜리 힐링 영화는,
작은 실수로 시작된
꾸리꾸리한 기분을
덮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속이 좁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고 일어나서도
지속되는 무거운 기운에
하루 종일 집에
붙어 있고 싶어진다.
어찌저찌 도착한
회사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며
덜 깬 정신을 차려보고,
전날의 실수를 인정하듯
조금씩 키보드를 두들기며
잘못된 부분을 고쳐본다.
이번에는 정말
완벽하다고 확신하며
상사에게 서류를 전달할 때,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에
발목에 묶여있던
의기소침, 좌절감, 자책감이
가득 들어 있던
모래주머니가 터지면서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진다.
나름대로 쭈굴거리는 감정을
가려보겠다고
그럴듯해 보이는
여러 감정으로 덮어봤지만,
이미 마음 공간에는
쭈굴함 블록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라
새로운 블록을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벅찼던 것 같다.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여야
깨지는 테트리스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조금이라도 움직였을 때
가장 아래에 묵혀있던 블록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블록들도
덩달아 깨지며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일
공간이 넉넉해졌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건지
기분 탓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에그 마요 샌드위치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걸 보니,
오늘은 뭐든 다
소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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