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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서린 Nov 25. 2024

5화 소개팅


서울에 자리를 잡아갈 때쯤 대학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소개팅을 해보지 않겠냐는 거다. 가벼운 마음으로 좋다고 하고 연락처를 받고 저장했다. 소개팅할 상대방도 연락처를 받았는지 금세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연락한 다음 날이 일요일이어서 말 나온 김에 일요일에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연락을 끝내고 카카오톡을 보는데, 친구 추가에 소개팅할 남자의 프로필 사진이 떴다. 본인 얼굴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두고 있었다. 궁금하던 차에 미리 보자 싶어 사진을 눌러봤다. 후회했다. 소개팅한다고 하지 말 걸 싶었다. 이미 몇 분 전에 약속을 했는데 취소하기도 뭐 했다. 심란한 마음을 안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그래도 실물은 또 다를 수 있지 생각하며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고 약속 장소인 합정역으로 갔다. 더운 8월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역사를 나와 서있는데 전화가 왔고 소개팅남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껏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는 남자는 키가 아주 컸고 덩치도 좋았다. 어젯밤 프로필 사진에서 인상 쓰고 있던 그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인 듯 보였다. 얼마나 다행이던지. 내가 키가 작은 편이라 키가 큰 것도 좋아 보였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서 기대감을 제로에 가깝게 없애버리더니 실물은 그 사진보다 훨씬 나아서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이 상황이 참 다행스러웠다. 사진을 보고 한껏 기대하고 나왔는데 실물이 못한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알고 보니 모르는 동네라 미리 와서 주변을 좀 살펴보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줄 알았는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니 사람이 괜찮아 보였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갔으면 일찍 갔지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이상 거의 늦는 법이 없다. 늘 친구와의 약속에서도 내가 기다리는 편이 많기 때문에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것, 그리고 나보다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게 좋은 첫인상을 가지고 이야기할 카페를 찾아갔다. 소개팅남은 더운 날인데 긴 바지를 입어 연신 땀을 닦았다. 종아리가 터질 것 같은 핏한 바지가 불편해 보였다. 미리 둘러보았다고는 하지만 어디에 들어갈지는 못 정해두어서 가다가 보이는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자고 했다. 내가 이끌어 들어간 카페에는 에어컨을 안 틀어주어서 얘기하는 내내 좀 더웠다.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는 공통 관심사가 없으면 한 사람만 계속 말하게 되거나 재미없게 삐그덕 대며 흘러가버릴 수 있다. 여행 얘기를 하다가 소개팅남이 인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류시화 님이 쓴 인도 여행기를 고2 때 친구에게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책이 재밌기도 하고 좋아서 서울로 이사 올 때도 가지고 왔었다. 그래서 실제로 인도에 가봤다는 소개팅남의 얘기가 흥미롭게 들렸다. 그 주제로 생각보다 대화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동갑이라 그런지 얘기하기가 더 편하기도 했다.



홍대로 가서 미리 알아놨다는 곱창집을 찾아가 곱창도 먹고 맥주도 한 잔 했다. 밤이 되어 헤어지고 안부 메시지를 서로 전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리고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다섯 번 정도를 더 만났다.


홍대에서 사원들끼리 회사 회식을 하던 어느 날, 소개팅남에게 연락이 왔다. 그전에 여러 번 만나기도 했고 거의 매일 연락을 주고받아서 어느 정도 편해져 있었던 때였다. 어디냐고 물어서 홍대라고 하니 자기는 시청 근처인데 홍대로 가도 되냐는 것이다. 평소와 다른 전화 뉘앙스에 뭔가 들뜬 마음이 들었다. 눈치 빠른 나는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정식으로 만나보자는 얘기를 할 거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나 또한 소개팅남과 만날수록 좋은 마음이 생겨 이 사람과 진지하게 만나게 되면 어떨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갑자기 회식 중에 이쪽으로 찾아오겠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홍대역 9번 출구에서 나오는 소개팅남은 술을 좀 마신 듯 보였다.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2km 정도 될 것 같은 거리를 걸어서 내가 사는 원룸이 있는 역으로 걸어갔다. 나는 꽤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렇지만 발이 아픈지도 모르고 기억도 안나는 의미 없는 대화들을 이어나갔다. 걷다 보니 도착한 내가 사는 동네, 그곳 역 앞에는 작은 공원에 벤치가 있었다. 그 벤치에 잠시 앉았다. 남자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런저런 말을 이어 가더니


"우리 정식으로 만나볼까?"라고 말했다.


내가 말했다.


"그래."


남자가 말했다.


"내가 잘할게. 네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갈게."



사실 정식으로 만나보자는 말을 할 때, 앞에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그 후에 했던 잘하겠다는 말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겠다는 말은 인상에 오래 남았다.



10월 2일에서 10월 3일로 넘어가는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고, 개천절이 우리의 1일째 날이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연인이 되었고, 반년 동안은 다툼 없이 행복한 연애를 했다.





<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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