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지 1년 반 가까이 되었을 무렵 남자친구와 나는 각자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둘 다 다니던 회사에 대한 불만이 많아서 이직을 준비했다. 몇 달이 걸려 둘 다 이직을 하고 나서 남자친구는 우리 집에 인사를 왔다. 부모님은 결혼 생각을 물어보셨고 자연스럽게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프러포즈를 따로 받지도 않은 채 갑자기 상견례 날짜까지 잡혀버렸다. 지방이 고향인 여자친구 집에 인사를 간다는 건 그냥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결혼을 생각하고 인사를 하러 간 것이지만 프러포즈도 안 받고 상견례를 하기는 싫었다. 사실 프러포즈는 여자가 해도 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남자친구가 길 가다 갑자기 또는 그냥 집에 있다가 갑자기 무릎 꿇고 반지를 내밀며
"나랑 결혼해 줄래?"라고 프러포즈하는 장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소개팅 후 사귀기 전 세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혜화에 있는 낙산공원에 갔었다. 해 질 녘 낙산공원 성곽길은 가을에 적당한 온도와 불빛과 함께 감성적이었고, 어떤 이야기에 나올 법한 한 장면 같았다. 한 번씩 다시 오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서울로 올라와서 얼마 안돼 혜화에 갔다. 혜화동 칼국수에서 식사를 하고 남자친구는 낙산공원에 산책을 가자고 했다. 비가 오고 있었는데 말이다. 누가 봐도 프러포즈하려는 사람 같았다. 평소 데이트하러 나올 때 들고 나오지도 않는 가방까지 메고 와서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알아챌 정도였다.
하지만 그냥 눈치챈 척하지 않고 따라갔다. 우산을 쓰고 가다가 낙산공원 성곽길 중간쯤에서 남자친구는 나에게 잠시 눈을 감으라고 했다. 이렇게 긴장감과 놀람이 없는 프러포즈라니. 재밌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눈을 뜨면 반지를 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을 뜨라고 해서 눈을 떠보니 알 수 없는 상자를 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상자를 들고서 남자친구는 "나랑 결혼해 줄래?"라고 말했다. 반전이었다. 기분이 알쏭달쏭했다. 비를 맞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다가가 일단 "좋아."라고 얘길 했다. 남자친구는 그 상자를 주며 열어보라고 했다. 그 상자를 열어보니 반지가 있었다. 난 왜 반지를 꺼내서 보여줘야지 상자를 들고 있었냐고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유명한 브랜드였는데 친구가 여자들이 이 상자를 보여주면 엄청 좋아할 거라고 알려줬단다. 그런데 난 샤넬, 디올, 구찌 같이 굉장히 보편적으로 유명한 브랜드가 아니고서는 그런 걸 잘 몰랐고, 살면서 명품은 사본 적이 없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자기가 예상한 표정이나 반응이 아니라 남자친구는 이상하다고생각했단다. 나중에 굉장히 유명한 브랜드라는 걸 알고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건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결혼반지를 맞출 거라서 프러포즈 반지는 비싸지 않은 반지를 사길 바랐는데 말이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프러포즈를 받았고, 우리는 힘들지만 즐겨가며 척척척 결혼 준비를 해나갔다.
결혼 준비를 하는 중에 한 번씩 심하게 다툴 때도 있었다.
뭔가를 고르는 건 남자친구가 거의 내 의견을 따라주어서 그런 걸로는 싸울 일이 없었다. 무슨 이유로 싸운 건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나지만 어쩌다 싸우게 될 때는 이 결혼을 해도 될까 고민이 되는 순간도 있었다.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하고 또 옆에서 함께 준비하며 고마웠던 시간들을 지나 어느새 우리는 결혼식장에 서 있었다.
고향에는 버스를 대절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대절 버스에서 손님들께 대접해야 할 음식들을 준비한다고 힘들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결혼을 하다 보니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나 지인 중에는 내 결혼식에 오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 멀리서도 따로 차를 타고 서울까지 와준 친구나 지인들도 있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결혼을 먼저 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결혼을 하고 나면 인간관계가 한 번 정리된다고 하더니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내가 원래 살던 곳과 먼 서울에서 결혼을 하다 보니 그런 말들이 더 와닿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여러 감정을 느끼며 그날만큼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무대 위 주인공이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도 있는 이벤트를 몇 달간 정신없이 힘들게 준비하고 드디어 홀가분하게 다 날려버릴 수 있는 결혼식이 끝났다.
결혼식이 끝난 후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신혼여행을 떠났다. 몰디브로 갔다. 신혼여행이 아니면 평생 못 가볼 것 같아서...
비행기에서 내려 마지막에는 경비행기를 타고 몰디브 섬으로 들어갔다. 경비행기에서 바라보는 바다색이 신비로웠다. 바다 한가운데서 하는 스노클링,스쿠버다빙 같이 못해본 경험도 많이 해 보고,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바다도 보았다.다시 돌아갈 때는 싱가포르를 경유해서 싱가포르까지 하루 여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직장을 다니며 여느 신혼부부와 같이 소소하고 즐거운 일상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신혼시절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크리스마스를 처음으로 우리 둘만의 집에서 보낸 것, 전주에 여행을 갔던 것, 가평 아침고요수목원에 갔던 것 그리고 주말에 혜화 낙산공원에 갔던 것, 퇴근 후 동네 삼계탕 집에서 만나 삼계탕을 먹었던 것. 그게 전부이다.
그건 우리가 생각보다 아이를 빨리 가져서 신혼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첫 유럽 여행에서 못 가본 다른 나라나 미국 같은 곳을 신혼 때 갔었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31살 겨울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질 거라면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일찍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결혼하고 한4~5개월 정도 됐을 때 2세 계획을 세웠다. 감사하게도 금방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희미해서잘못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남편에게 임신테스트기를 보여주니 생각보다 놀라거나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었다.생각한 반응은 아니어서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 주 주말, 남편과 같이 산부인과에 갔다. 진짜 임신이 맞았다. 너무 극초기여서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임신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