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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Mar 22. 2024

매듭짓는 마음

맺음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5회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구씨: "확실해? 봄이 오면 다른 사람 되어 있는 거? 추앙하다 보면 다른 사람 돼 있을 거라며."
미정: "한 번도 안 해봤을 거 아니에요. 나는 한 번도 안 해봤던 걸 하고 나면 그 전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 있던데."

구씨의 질문에는 변화하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있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 구씨는 미정을 떠나야 했지만, 그들은 이미 다른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추앙했으니까요.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라는 응원으로 서로를 성장하게 했습니다.


한겨울에 시작한 <시 짓는 마음> 연재를 봄에 마칩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보고 계신 지금, 저는 다른 사람이 돼 있습니다. 첫 연재를 마친 사람이요. 응원해 주신 덕분입니다.


마지막 노래 퀴즈입니다. 요즘 인기인 곡이라 다들 아실 것 같은데요. OOO에 들어갈 단어는 무엇일까요? 이 노래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떠나는 길에 니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OOO

정답은 60초 후에 공개하기로 하고 <매듭짓는 마음> 편 시작합니다.




매듭은 처음과 끝이 교차해 원을 그리며 만들어집니다. 매듭의 수만큼 원을 만들게 되지요. 둥그런 원을 만드는 마음이 담긴 시 한 편 감상하시겠습니다.


 원주율

 

 초코파이를 받았다

 피를 뽑고 약해질 때마다

 착해지는 기분이 된다

 

 피 주머니가 빵 봉지처럼 부풀어 오르는 동안

 

 원의 둘레를 재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무수한 직선을 잇고 이어서

 곡선을 만들었을 수학자에 대해

 사실 휘어짐이란 착시일 뿐이라고

 

 뼈의 모양은 직선이지만 서로의 뼈를 비스듬히 잇고

 뼈를 또 잇고

 이어서

 둥그런 원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상처를 솜으로 막아 피를 굳게 하는 동안엔

 모두가 조금씩만 아파주면

 한 사람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고

 

 초코파이와 오렌지주스는 맛있고 누군가는

 상냥했다

 상냥한 사람이 되기까지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다

 

 헌혈의 집을 나서자

 파이가 빨간 비닐을 벗으며 둥그렇게 떠오르고 있고

 

 그 속으로 역광을 만들며 걸어가는 사람들

 인간의 모양이 휘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한 사람을 위해 팔을 꺾는 사람들과 있었다

 우리가 햇빛 속에 함께 있음을

 무수한 뼈를 엮어 만든 포옹이라 느낄 때

 지평선은 물결이 되어

 일렁거리고

 

 이제 바늘 자국을 만져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돌고

 돌아서

 나의 차례였다

 

조온윤, 『햇볕 쬐기』, 창비, 2022.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情(정)이 느껴집니다. <원주율>은 조온윤(1993~ ) 시인의 첫 시집 『햇볕 쬐기』(2022)에 실려있습니다. '햇볕 쬐기'라는 제목과 시인의 이름 '온윤(溫潤)'처럼 따스한 느낌의 작품으로 가득한 시집입니다.


<원주율>은 헌혈이라는 일상의 소재로 함께 사는 따스한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무수한 직선을 이어 곡선을 만들 듯 서로의 뼈를 비스듬히 이어 둥그런 원을 만들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말합니다. "모두가 조금씩만 아파주면/ 한 사람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며 "팔을 꺾는 사람들"이 모여 "물결"을 이룹니다. 그렇게 "햇빛 속에 함께 있음"을 느낍니다.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고 돌고 돌아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뿐이라며 아픔의 연대를 이야기합니다.


조온윤 시인은 햇볕 같은 따스함을 담아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시인의 말

"너희가 슬픔을 주었구나
나는 슬픔을 어르는 손길을 줄게"

자신을 선량한 사람이라기보다 "선량하고자 애쓰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그는 '시인의 말'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의미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어떤 사람들에게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서, 혼자 우울에 빠져 움츠려 있던 시간이 길었어요. 그 시간이 아까웠고요. 그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좀더 밝은 성격으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도 제가 잃은 만큼 똑같이 갚아주어야 아쉬움이 해소될 것만 같았는데 그럴만한 담력이나 악기(惡氣)도 없는 데다 이미 그 사람들은 제 삶에서 멀리 떠나간 뒤라서 그게 불가능한 거죠. 그럼 이 억울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했을 때, 나는 그들처럼 슬픔을 주는 대신 그것을 보듬는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싶었어요."
출처: 2022년 3월 인터뷰

위로와 치유 더 나아가 공존과 연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원주율>에서 "무수한 뼈를 엮어 만든 포옹"으로 표현된 연대 의식은 그동안 우리가 함께 읽은 여러 시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시가 떠오르시나요? 기억이 안 난다고요?


그럴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그동안 읽은 시의 목록입니다.


01. 시 짓는 마음: 여는 말

강경 <시 짓는 마음>

02. 밥 짓는 마음

김지하 <밥은 하늘입니다>

손택수 <외할머니의 숟가락>

03. 옷 짓는 마음

천양희 <단추를 채우면서>, <옷깃을 여미다>

04. 집 짓는 마음

박소란 <주소>

김성규 <독산동 반지하 유적지>

김신용 <민달팽이>

05. 죄짓는 마음

이충희 <면죄부>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 <먹은 죄>

06. 한숨짓는 마음

이정록 <한숨의 크기>, <그럴 때가 있다>

07. 눈물짓는 마음

성미정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

기형도 <엄마 생각>

박준 <종암동>,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08. 이름 짓는 마음

성미정 <흘러간다>

강경 <얼룩말>

09. 짝짓는 마음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진은영 <청혼>

10. 무리 짓는 마음

이영광 <독방>, <외계인이 와야 한다>

11. 미소 짓는 마음

임길택 <나 혼자 자라겠어요>

최우홍 <나도 광부가 되겠지>

민시우 <슬픈 비>, <영원과 하루>

박채연 <여덟 살의 꿈>

김응 <꽃>

12. 매듭짓는 마음: 맺음말

조온윤 <원주율>


이상 23명의 작가가 쓴 31편의 시를 함께 읽었습니다. 시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시어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고 시인의 마음을 탐구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누구나 쓸 수 있는 시("밥 아저씨 1"), 시가 된 노래("밥 아저씨 2"), 가사와 시의 차이, 시 인용 오류, 행과 연의 강조 효과, 시의 난해함, 연작시, 산문시와 산문의 차이, 알레고리, 노래가 된 시("트루베르"), 동시, 꼴값, 양아치, 무리수 등의 내용을 다뤘습니다.  


시 목록을 보니 기억이 나시나요? <원주율> 외에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연대 의식이 담겨있는 시는 무엇이었을까요? 안 가르쳐주려다가 마지막 편이라 순순히 말씀드립니다. 이정록 <그럴 때가 있다>,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진은영 <청혼>입니다. 못 맞췄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복습할 기회가 있으니까요.


이제 <시 짓는 마음> 연재를 마쳐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돌고

돌아서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그만 질척거리고 매듭짓겠습니다. 마지막 퀴즈 정답을 발표합니다.

떠나는 길에 니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OOO

정답은 <밤양갱>입니다. "왕밤빵" 아니고요. 장기하가 만들고 비비가 부른 곡입니다. 이별의 순간에 바랐던 달디단 밤양갱은 소박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동안 시 세계로의 여정을 함께하며 달디단 '라이킷'과 마음으로 응원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원글보다 더 풍성한 댓글로 작품을 만들어 주신 작가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뼈대만 세우고 시작한 <시 짓는 마음>이 튼튼한 집으로 완성됐습니다. 앞으로도 시 사랑은 계속될 것이므로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다른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시를 짓는 마음은

알 수 없는 표정 그리고

살포시 미소 짓는 마음

손끝에 힘을 주고도

성글게 매듭짓는 마음


비비 <밤양갱>


끝인 줄 아셨죠? <시 짓는 마음> 연재가 끝나서 아쉬우신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몰입의 기쁨> 시의 세계에 입문한 계기에 관한 글입니다.

<시 합평 수업과 신춘문예> 시 합평 수업 경험담입니다.

<"오늘도 OO이 보고 싶으면"> <시 짓는 마음> 패러디입니다.


시 창작 관련 브런치 북

바람 작가님의 <시가 삶에 들어오면> 시 창작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창작시와 함께 소개해 주십니다. 함께 수업을 듣는 것 같이 현장감이 느껴집니다.

박성현 시인의 <금요일의 시창작 노트>, <금요일의 시창작 노트 2> 고급 시 창작 수업에서 교재로 쓰일 만한 글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1권부터 보시기를 권합니다.


시, 소설 창작 수업

말과활아카데미, 한겨레교육 온라인 수업이 있습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비문학전공 작가 지망생을 위한 과정입니다.

여러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시간제 등록'으로 원하는 수업만 들을 수 있습니다.


시 창작 관련 정보를 공유해 주시면 목록을 업데이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성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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