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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Mar 01. 2024

짝짓는 마음

<시 짓는 마음>의 여덟 번째 시어(詩語)는 "짝"입니다.


또 90년대의 향기가 폴폴 나는 노래를 들고 왔습니다. 다음 곡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 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그 음악을 내 귓가에 속삭여 주며
아침 햇살 눈 부심에 나를 깨워 줄
그런 연인이 내게 있으면

나는 아직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프리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 줄
그런 연인을 만나 봤으면

노랫말에 힌트가 있지요. 1994년 3월에 발표된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입니다. 30년 전 노래다 보니 지금과는 다른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가는 일은 이제 흔치 않습니다. 이메일, 카톡, 인스타그램 DM, 영상통화에 익숙한 시대니까요. 그리움과 기다림은 아날로그 시대의 감성으로 남은 걸까요?


<칵테일 사랑> 노랫말에 '시'가 있네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향기로운 칵테일, 프리지아 꽃향기도 있습니다. 없는 게 하나 있지요. '연인'입니다. 연인을 향한 그리움과 기다림, 사랑을 담은 시 세 편을 준비했습니다. 연인은 없고 남편만 있는 X세대 아줌마의 <짝짓는 마음> 편 시작합니다. 




<옷 짓는 마음> 편에서 노랫말이 시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시가 노랫말이 되기도 합니다. 정지용의 <향수>,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초혼>, 박두진의 <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정호승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등의 시들이 노래가 된 예가 있지요.


짝에 관한 첫 시를 노래로 감상하시겠습니다. 

[트루베르 -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정본 백석 시집』, 문학동네, 2007. 


트루베르(Trouvere) 시를 노래로 부르는 팀입니다. 프랑스어로 '음유시인'이라는 뜻입니다. 백석(본명: 백기행, 1912~1996)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를 2013년 1월에 싱글로 발매했습니다. 1936년에 발간된 백석 시집 『사슴』에 실린 원문대로 "힌당나귀"로 표기했습니다. 


『사슴』은 계간 『시인세계』가 2005년에 156명의 시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현대시 100년 최고의 시집'으로 뽑혔습니다. 시인들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백석은 수려한 외모로도 유명합니다. 교과서에 나온 시인이니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백석의 일대기는 책 한 권이 될 만큼 다룰 이야기가 많기도 하고요. 네, 백석에 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은근슬쩍 넘어가겠다는 얘깁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출출이', '마가리', '고조곤히'는 백석의 고향 평안도 방언입니다. 각각 '뱁새', '오막살이', '고요히'라는 뜻입니다. '나타샤'는 톨스토이 소설 『전쟁과 평화의 인물에서 따온 이름으로 백석이 '자야'라는 애칭을 지어준 기생 김영한(1916~1999)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석이 만주로 떠나고 한국전쟁 후 북한에서 살던 동안 김영한은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경영하며 천억 대의 재산을 일궜습니다. 그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를 세웠습니다. 김영한은 백석과의 이야기를 『내 사랑 백석』(1995)이라는 산문집으로 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움을 시와 산문에 담은 백석과 자야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그들은 흰 당나귀가 있는 이상향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을까요. 




어느덧 3월입니다. 이제 곧 봄바람이 불고 눈 녹은 자리에 꽃피는 계절이 찾아옵니다. 꽃이 만발한 계절의 고백은 어떤 느낌일까요? 기다림의 마음을 담은 두 번째 시 감상하시겠습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에게 바짝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는 이원하(1989~ ) 시인의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심사평을 보실까요.

"...거두절미하고 읽게 만드는 직진성의 시였다. 노래처럼 흐를 줄 아는 시였다. 특유의 리듬감으로 춤을 추게도 하는 시였다.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천진 속의 시였다. 근육질의 단문으로,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시였다. 무엇보다 '내'가 있는 시였다.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였다. 시라는 그 어떤 강박 속에 도통 웅크려본 적이 없는 시였다. 어쨌거나 읽는 이들을 환히 웃게 하는 시였다. 웃는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예쁜 얼굴을 가져보게도 만드는 시였다."   

- 박상순, 손택수, 김민정 시인의 심사평 (출처: 한국일보)

심사평에서도 시처럼 경쾌한 리듬감이 느껴집니다. 천진하고 당돌한 시적 화자가 흘리는 웃음을 따라 같이 웃게 됩니다. 신춘문예 당선작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주는 시입니다.


이원하 시인은 힘든 시기에 제주에서 생활하며 치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좋아하던 남자가 제주에 찾아왔을 때 함께 종달리에 갔습니다. 수국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를 보고 순간 수국에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나도 수국처럼 예뻐지면 저 남자가 나를 바라봐 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을 시에 담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 사람의 시선이 머무는 대상이 되고 싶은 마음을 풋풋하고 싱그럽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누굴 위해 무엇이 되고자 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직진 끝에는 함께하자는 고백과 약속이 있겠지요. 그 마음을 담은 시 감상하시겠습니다.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웅성대는 별들과 벌들, 은색 드럼을 치듯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의 이미지로 사랑스럽게 표현했습니다.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쓴잔을 죄다 마시겠"다는 고백이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킵니다. 


<청혼>은 진은영(1970~ ) 시인이 10년 만에 낸 네 번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의 첫 장에 실린 작품입니다. 시집 1부의 제목이 "사랑의 전문가"이고 첫머리에 "나는 당신에게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해줄 말들을 찾고 있어요."라는 영국 소설가 존 버거의 말을 인용해 적었습니다. "시인의 말"에서도 같은 마음, '연대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인의 말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이 시집에는 2014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진은영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관심을 갖는 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청혼>의 "너"는 인류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은영 시인은 학생들에게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거리'에 다녀온 뒤 감상문을 써서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오래된 거리'가 흔적 없이 사라진 걸 알게 된 학생들은 무척 슬퍼했다고 합니다. 저의 오래된 거리, 강경은 발전이 더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의 오래된 거리인 가족과 친구가 여전히 그곳에 있고요. 


진은영 시인은 자신의 가장 오래된 거리는 문학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오래된 거리는 무엇인가요? 누구인가요?




연인을 위해서 쓴잔을 죄다 마시려는 마음을 표현한 시가 있습니다. 분량상의 이유로 박라연 시인의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의 전문과 감상이 담긴 글을 링크로 드립니다. 원영 작가님의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거냐고요? 네, 백석 시인 소개를 건너뛰었을 때 이미 제가 양아치인 걸 간파하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양아치 / 강경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나는 미국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나는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소주가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 feat. 백석, 이원하, 진은영, <카사블랑카>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의 원문은 "Here's looking at you, kid."입니다. 바라본다는 말을 그렇게 멋지게 표현했지요. 가족, 연인, 친구, 누구든 내가 바라보고 싶은 사람, 나를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사람과 함께 따뜻한 봄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짝은 무슨 꽃을 좋아할까요? 프리지아? 수국? 꽃의 즙을 짜서 마시는 정성으로 시를 써보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선사해도 좋겠고요. <양아치>라든가.


웃기고 이상한 사람이 되면 좀 어떤가요. 함께 웃으면 더 즐겁습니다. 


다음 주에 <시 짓는 마음>의 아홉 번째 시어, "무리"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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