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짓는 마음>의 일곱 번째 시어(詩語)는 "이름"입니다.
브런치 작가 신청서를 작성할 때 '작가소개'란에 무엇을 쓸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하고요. 브런치 작가들은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90년대 인기 가요가 생각났습니다. X세대 인증 시험에 다시 도전해 보실까요? 다음 노래의 가수와 제목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지금)
저 멀리서 누가 날 부르고 있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제)
우린 앞을 향해서만 나가겠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라는 철학적 성찰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듀스의 <우리는>입니다. 듀스 듀스 듀스 듀스...
난 누군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 글 쓰는 사람.
또 여긴 어딘가? 미쿡!
그렇게 듀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작가소개가 "고향에 돌아갈 날을 꿈꾸며 미국에 살고 있는 무명작가"입니다. 고향과 가족, 미국살이에 관한 수필을 주로 썼습니다. 시 세계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요.
'작가' 앞에 붙인 '무명'은 유명해지기 전 단계로서의 무명이 아니라 그대로 완성형인 무명입니다. 무명의 자유를 사랑하기에 유명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노벨 문학상에 도전하고 싶지 않은 이유입니다. (<옷 짓는 마음> 편 참고)
얼굴과 이름이 언론에 공개되는 걸 상상만 해도 부담스럽고, 유명세와 악플을 감당할 생각에.... 네? 뭐라고요? 아.... 꼴값한다고요. 꼴값 버라이어티 쇼가 되기 전에 무명작가의 <이름 짓는 마음> 편 시작합니다.
'이름'하면 생각나는 시, 김춘수의 <꽃>은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 존재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김소월의 <초혼>은 부르다가 죽을 만큼 간절히 바라는 이름에 관해 이야기하지요. 많은 작품이 '이름 있음'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름이 없다면 어떨까요? 이름에 관한 첫 번째 시 감상하시겠습니다.
깊은 물속에 그가 살았습니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름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도 다른 이들처럼 많은 이름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물결이 바뀔 때마다 이름이 변하는 건 물속 나라의 오래된 관습입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낡은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맞아야 합니다 가끔은 헤어지기 싫은 이름도 있었고 감당하기 버거운 이름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는 이곳의 관습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유독 바람이 심하던 어느 밤이었습니다 그는 사용하지 못한 새 이름을 놓쳐버렸습니다 어찌나 물살이 거센지 움켜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름을 잃은 벌은 가혹했습니다 그는 다음에 올 어떤 이름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에겐 이름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외톨이가 된 그는 이름이 없는 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남들이 쓰고 버린 이름이라도 주워 달려고 애썼습니다 그에게 맞는 이름도 없었을뿐더러 사람들에게 조롱만 받았습니다 홀로 지내던 그는 자신의 몸이 예전보다 가볍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름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도 서서히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어느 새벽 그는 물결 위로 떠올랐습니다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를 향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흘러가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찾게 되었습니다 흘러간다는 것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성미정, 『대머리와의 사랑』, 세계사, 1997.
'이게 시라고?' 하면서 읽으신 분? 당황하지 않고, '산문시'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를 운율, 행과 연의 형태에 따라 구분하면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형시는 일정한 운율 또는 행과 연의 형식을 갖추고 그 틀에 맞춰 내용이 구성됩니다. 자유시와 산문시는 그런 정형성 혹은 외형률을 파괴합니다. 자유시는 내용에 따라 행과 연을 나눕니다. ('행과 연의 강조효과'에 관해 알고 싶다면 <집 짓는 마음> 참고) 산문시는 행 구분이 없고 단락 단위로 구성됩니다. 산문시는 비유와 상징, 표현의 밀도와 같은 시적 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산문과 다릅니다.
성미정(1967~ ) 시인의 <흘러간다>가 산문이 아니라 산문시인 이유를 살펴볼까요. 먼저, 문장에 마침표가 없네요. 산문의 문장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문장에 마침표가 있는 산문시도 있어서 마침표의 유무로 산문시와 산문을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내용을 들여다볼까요. "흘러간다는 것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습니다"에서 그는 누구일까요? 물속에 산다니 해양 생물일까요? '흘러간다는 것'은 '주먹 쥐고 일어서' 같은 인디언의 이름일까요?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단어가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하게 되지요. '이름'이 상징하는 바도 천성, 관습, 역할 등등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흘러간다'라는 것에서는 규정되지 않은 존재와 자유로운 존재를 떠올릴 수 있고요. 곧이곧대로 해석하기보다 시어에 담긴 뜻을 살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산문시에서는 비유와 상징 같은 시적 장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흘러간다>에서 '그'는 이름이 없어서 자유로워지고 살던 곳을 벗어나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처럼 자유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도 자유로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시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시를 공부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A4 용지 두 장을 꽉 채운 산문시를 보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길게 쓸 거면 산문으로 쓰지. 시의 매력은 간결성에 있는 게 아닌가. 이러니 시가 어려울 수밖에.'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긴 산문시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산문시의 매력을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산문시의 매력을 알게 해 준 시집이 있습니다. 임유영 시인의 『오믈렛』(2023)과 성미정 시인의 『대머리와의 사랑』(1997, 2020)입니다. 성미정 시인의 첫 시집인 『대머리와의 사랑』(1997)은 절판되었고, 2020년에 '문학동네'의 복간 시집 시리즈로 출간되었습니다. <흘러간다>가 실려있는 시집입니다.
성미정 시인은 앞서 <눈물짓는 마음> 편에서 소개한 작가입니다. 눈물은 어디에 있다? OO에 있다. 설마, 아직도 사랑이 왜 야채 같은 건지 모르시는 건 아니죠?
이름에 관한 두 번째 시 소개합니다. 작년 3월 얼룩말 '세로'의 동물원 탈출 소동을 소재로 한 시입니다.
세상이 온통 어두워지고
그는 스르르 가로지어 눕는다
자양동 아스팔트 도로 위
흑백 줄무늬가 달린다
기껏 동물원 울타리를 밟고 나와 마주한 풍경은
이름 없는 조상이 뛰놀던 아프리카 초원이 아니었다
그는 몸에 새겨진 철창을 벗어 던지고
아무개로 살고 싶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 보며
어미아비를 떠올린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자유를 향한 도전에 마취총을 겨눈다
타닥 탁탁탁 타닥
기억을 잃은 몸이
회색 천으로 덮인다
초원의 꿈은
풀 한 포기 뜯지 못하고
다시, 세로 창살에 갇힌다
자작시입니다. 작년 여름에 시 창작 수업에서 '알레고리'에 관해 배우고 쓴 저의 1호 시입니다.
여기서 잠깐,
알레고리(allegory) 또는 풍유(諷諭)란?
"의도하는 바 본래의 의미는 숨기고 다른 말 또는 이야기를 내세워 본래의 의미를 암시하는 비유법이다. 그러므로 첫째 풍유는 표면적으로 전개되는 구체적 사실 또는 정황과 이면에 숨겨진 추상적 의미의 층이 통상적으로 존재하고, 둘째 원관념(추상적 의미)이 숨고 보조관념(구체적 사실사건)만 나타나 있으므로 상징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나 풍자·비판·교훈성을 적극 띠고 있는 점이 다르다."
오유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2022, 342-343쪽.
문학 작품에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십중팔구 알레고리 기법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1945)이 있습니다. 실제 인물들(원관념)과 역사적 사건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동물들(보조관념)을 내세워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했습니다.
알레고리 기법을 사용한 시의 예로 김기택의 <소>와 <멸치>, 이윤학의 <개구리>, 박성우의 <거미>가 있습니다. 저는 <거미>를 추리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왜 추리 소설 같은지 궁금하시죠? 궁금하면?
<얼룩말>의 창작 배경입니다. 동물을 소재로 시를 쓰려니 얼룩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얼룩말 '세로'의 이야기를 수필로 썼었거든요. 실제 사건을 요약하듯 써도 시가 되려나 하면서 수업 시간에 낭독했는데 시인 선생님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얼룩말>과 수필 <철부지>를 몇몇 지인에게 보여줬는데 다들 시가 더 좋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로 시 창작에 주력하게 됐습니다.
<얼룩말>은 '이름'이 주는 구속과 속박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얼룩말에게 줄무늬가 없었다면 '얼룩말'이라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겠고 동물원에 갇히지도 않았겠지요. 얼룩말에게 줄무늬는 태생적으로 주어진 "철창"과 다름없습니다. 인간이 지어준 '세로'라는 이름 또한 줄무늬처럼 얼룩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와 같습니다. 야생 동물에게 이름이 있다는 게 비극이 아닐까요. 이름이 있는 '세로'는 "이름 없는 조상"처럼 "초원"에서 "아무개"로 살 수 없습니다.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사람들이 쏜 마취총에 맞아 쓰러지고 이름을 거부하듯 "가로"지어 눕습니다. 그리고 다시 동물원에 갇힙니다.
'세로'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자연을 떠나 도시에 살면서 이름이 부여한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며 자유를 갈구하는 현대인, 그리고 이름에 손발이 묶여 자유롭지 못한 유명인의 비애를 들여다봅니다. "왕관을 쓴 자여, 그 무게를 견뎌라." 셰익스피어가 한 말처럼 이름이 있는 자는 그 이름의 무게를 견뎌야 합니다.
가수 이효리는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혀지긴 싫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능한 것만 꿈꿀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면서요. 유명인이 되어도 조용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만약, 그럴 방법이 있다면 노벨 문학상에 도전을...
무명 예찬 / 강경
이름 없이 살고 싶은 꿈은
이룰 수 없어도 꾸고 싶은 꿈
이루어질 수 없기에 달콤한 꿈
- feat. 영화 <달콤한 인생>
제 필명 강경은 제 고향의 이름입니다. 드라마 <무빙>에서 초능력자들의 암호명이 진천, 나주, 봉평, 구룡포, 문산 같은 고향 지명이었죠. 덕분에 필명 부심이 생겼습니다. 내 암호명은 강경, 내 (초)능력은 글짓기!
수년 전에 <집사부일체>라는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양세형이 자신의 묘비명을 썼습니다.
그런 표정으로 서 있지 말고
옆에 풀이나 뽑아라
그게 나의 계획이었다
개그맨답게 재치 있고 시집을 낸 작가답게 글에 여운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남기고 싶은 한 문장을 적어봅니다.
“고향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고향에 돌아와 잠들다.”
여러분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한 문장은 무엇인가요? 어떤 이름으로 남고 싶은가요?
다음 주에 <시 짓는 마음>의 여덟 번째 시어, "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허파꽈리 작가님의 에세이 <긴긴밤, 우리를 떠올려>와 그 글에 달린 희서 작가님의 댓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동화 <긴긴밤>(2021)의 내용 일부를 <이름 짓는 마음> 편에서 소개하고 싶었는데 분량상 다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렇게 글로 남깁니다.
"상처 많은 존재들이 서로를 보듬어가며 동행하는 모습, 이름없는 펭귄에게 '이름 없어도 네 말투, 네 냄새만으로 충분히 너를 알아볼 수 있다'고 한 노든의 말 등이 특히 기억에 남네요."
(희서 작가님의 댓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