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의 교훈과 안전사회(8) 독립적인 독성관리 필요
중독센터(Poison Center)는 유럽에서 1940년대부터 도입되었고 미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도입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화학물질 중독사고에 따른 공중보건 위기대응 차원에서 중독센터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중독센터를 도입한 나라들은 그동안 방대한 중독정보를 축적하고 실시간으로 중독사고를 감시하는 시스템으로 발전시켜가고 있다.
반면 한국은 중독센터를 도입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서울특별시에서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환경부나 질병관리청도 도입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전면적인 도입은 아니다. 중독센터를 앞서 도입한 국가들과의 격차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 분야에서 너무 뒤처져 있다.
우리나라는 왜 중독센터 도입에 미온적인 것일까? 가습기살균제참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온적인 현실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 봤다.
중독센터를 국민 보건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규제의 일환으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중독센터는 독성물질 중독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다. 세계보건기구도 이러한 목적을 명확히 하고 있다. 화학물질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고 크고 작은 중독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중독센터 도입은 서둘러야 마땅하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중독센터는 각 종 독성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이러한 중독센터가 갖는 정보 접근 권한에 대해서 기업의 경우는 규제 업무로 느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중독센터에 제출해야 할 생활화학제품의 세부 정보에 대해서 해당 기업은 영업비밀로 간주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꺼려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관료조직 내 부처 칸막이 문제이다. 이는 특정 소관부처의 책임이 아니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관료문화이다. 중독센터는 여러 부처가 협력해야 하는 업무여서 특정 소관부처가 지정되지 않으면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중독센터는 정보 제공에 우선순위를 두면 환경부에 소관을 둘 수도 있다. 환경부는 화학물질과 화학제품에 대한 정보를 취급하고 있으므로, 독성정보를 확보하고 제공하는데 이점이 있다. 중독사고에 따른 응급 대응과 치료 기능에 우선순위를 두면 보건복지부에 둘 수도 있다. 중독센터는 주로 병원에 설치되므로 보건복지부가 이점을 갖고 있다.
질병 감시에 우선순위를 두면 질병관리청에 우선순위를 둘 수도 있다. 질병관리청은 감염성 질환을 주로 다루지만, 가습기살균제 질환과 같이 비감염성 요인으로 인한 질환을 감시해야 한다는 요구도 늘어나고 있다. 이와 같이 질병관리청이 모든 질환에 대한 감시를 전담하는 컨트롤타워 기능을 갖는다면, 중독센터를 질병관리청에 두는 것도 방안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중독센터를 도입하겠다는 본격적인 논의도 없었고, 그에 따라 특정 소관 부처를 정하지도 못했다. 향후 도입하게 될 중독센터는 주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소관부처도 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좀 더 거시적인 맥락에서 중독센터가 도입이 되지 못한 이유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근본적으로 독성 또는 독성학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 내지 문화를 짚어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기간 중 만난 어떤 독성학자는 “독성학은 부자나라의 학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서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이해를 못 했었다. 말 그대로라면, 독성학은 부자나라에서나 가능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도 부강해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독성분야’에 대해 본격적으로 투자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여기에는 그동안 ‘홀대’(?) 받아 온 독성 분야에 대한 개탄과 자기 위안이 담긴 말일 수도 있다. ‘독성’을 ‘규제’로만 받아들여서 손발을 묶어 놓으려고 하면, 독성학 분야는 후퇴할 수밖에 없고, 중독센터와 같은 시스템 도입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 더 늦어져 만시지탄(晩時之歎)이 되기 전에 국가 독성 관리에 대한 비전을 갖고 적극적으로 관련 정책을 추진해 가야 한다는 주문일 수 있다.
해당 전문가는 중독센터 도입도 필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유롭게 독성을 연구하고 독성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독성전담기관’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기존 독성연구 시스템은 부처별로 관리되는 체계에서 이뤄지고 있어 연구의 한계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독성 연구를 통하여 특정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규제의 목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부처에 갇힐 경우 제 목소리를 올곧게 내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독립성을 갖는 독성전담기관을 통해 범부처적으로 자유롭게 독성을 들여다보고 독성이 미칠 수 있는 여러 방면의 영향을 연구하고 제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듯 독성 연구나 독성 감시와 같은 독성 분야는 독립성과 전문성의 원칙이 중요하다. 국가 독성 관리는 개별 부처와 협력하면서도 독립적인 지위를 갖출 수 있도록 거버넌스를 구축해가야 한다. 중독센터도 이러한 독립성과 전문성의 원칙과 거버넌스와 연계되어 구축될 수 있어야 한다.
가습기살균제참사는 대규모 독성 사고였다. 특정한 한 분야에서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이 참사의 교훈을 통해 우리 사회는 ‘독성으로부터 안전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 전반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독성에 의한 중독 사고를 감시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독성 안전 거버넌스가 구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