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살다
이런 봄에 여행을 가게 되다니! 살짝 들뜬 마음이 되었다. 퇴직을 하고 맞는 첫 봄, 퇴직기념을 해 주겠다는 고마운 후배의 제안이 있어 통영국제음악제를 향해 출발했다. 떠나기 전에 집 앞에 있는 벚꽃 몇 그루가 움트기 직전이었다. 여행 갔다 돌아오면 풍성하게 벚꽃이 피어 우리를 마주해 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여행을 시작했다. 출발하자마자 눈에 띈 꽃은 벚꽃이었다. 남쪽에서부터 벚꽃이 피어 올라온다는 벚꽃 만개 시기가 무색하게 이미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름답고 좋았다.
충청도 부근에 가니 벚꽃은 더욱 활짝 피어 있어 고속도로 주변은 물론 멀리 보이는 마을길과 호수 주변에 벚꽃이 가득했다. 아직 초록 잎들은 피지 않았는데 벚꽃은 풍성하게 만발하였다. 조금 더 내려가니 하얀 배꽃 나무 꽃도 모두 피었다. 벚꽃에 배꽃에 하얀 꽃들의 세계다. 경상도에 진입하니 벚꽃은 더욱 만발했다. 연한 초록잎과 어울려 북쪽에서 보는 벚꽃보다 더 예쁘게 느껴졌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마산에서 통영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타고 내려가 보았는데 그 길도 온통 벚꽃 길이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벚꽃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처음 감탄하면서 쳐다보던 벚꽃에 슬슬 멀미가 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5시간 동안 달려서 저녁 어스름에 통영에 도착했다. 통영은 내 기억에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36년 전 결혼하고 남편 고향인 통영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강력한 아름다움과 느낌이 지금도 여전하다. 파란 물빛과 하얀 집들, 다른 도시와는 다른 통영만의 느낌이 참 좋았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숙소 구하기도 어렵다고 하더니 우리도 미리 예약했지만 어렵사리 어촌 낚시마을에 있는 펜션을 구해 숙박하게 되었다. 깜깜했고 잔잔한 바다냄새만 가득했다.
아침에 일어나 서둘러 음악제가 열리는 통영국제음악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곳도 국제음악당으로 가는 모든 길에 벚꽃이 가득했다. 가는 길에 떠들썩한 분위기에 교통 통제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전혁림 미술관이 있는 봉수로에서 벚꽃 축제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음악제가 목표이니 그곳을 그냥 지나쳐 음악당으로 향했다. 통영국제음악당 앞의 바다는 참으로 아름답고 절경이다. 음악애호가는 아니지만 문화 활동을 하는 후배가 이틀 동안 무려 5개의 프로그램을 즐기도록 티켓을 준비해 주어 음악에 푹 빠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촉망받는 첼리스트 한재민의 연주와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리고 최고 인기였던 통영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까지 넘치도록 풍성한 음악회의 하루를 지냈다.
다음 날엔 오후에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 그전에 시간을 내서 봉수골 벚꽃 축제길을 찾아가 보았다. 통영 사람들 모두가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데 나는 다시 벚꽃 멀미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전혁림미술관 옆 작고 멋진 책방을 들러본 후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다시 남은 음악 프로그램을 즐기고는 저녁이 되어 하루 더 머무른 다음 집으로 오기 위해 나셨다.
뉴스에는 이상기온으로 전국에서 한꺼번에 벚꽃이 피었고, 예년보다 열흘 이상 빨리 핀 벚꽃으로 축제를 준비하던 많은 지역에서 당황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올라오면서 보니 남쪽부터 벚꽃이 휘날리며 지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올라올수록 벚꽃이 여전히 생생하기는 한데 조금씩 시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이제 감탄할 체력과 감정이 남아있지 않아 에고 저기도 벚꽃이네 살짝 한탄하면서 쉬엄쉬엄 집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북쪽에 있는 이곳도 벚꽃이 만개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우르르 벚꽃이 떨어진 모양새다. 2023년 벚꽃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벚꽃 피는 개화 시기지도가 무색하게 전 국토에서 한꺼번에 피고 한꺼번에 져버렸다.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각 지역의 특색이 사라지고 오직 벚꽃만이 만개한 것 같았던 개성 없는 통일성을 확인하면서 살짝 우울해졌다. 벚꽃이 순식간에 지나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탄식을 늘어 놓기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다양한 지역에서 다채로운 꽃과 나무를 만나며 계절을 천천히 느낄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컸던 벚꽃 구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