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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혹은 자백

by 밤비 Mar 10. 2025


1월 말이었지요. 추웠습니다. 막막하더군요. 꼭 길 끝에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귓불을 지나친 입김이 제 뒤통수를 비웃는 것만 같았습니다. 압니다. 아무도 면회 온 적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 년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달라질 건 없는데 말이죠,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되더란 말입니다. 씨발, 그런다고 죽는 년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 말 틀린 거 하나 없습디다. 코딱지만 한 그 작은 시골 동네가 소도시가 되어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지요. 옛날 같았으면 내 몸 하나 숨어들 곳 하나쯤 쉽게 찾았을 텐데 온통 아스팔트로 뒤덮인 고향에서 저는 또 혼자였습니다.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겨우 구했습니다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저 같은 인간은 그림자에도 전과자 딱지가 붙어 있답니까? 어떻게들 아는 건지, 별안간 눈빛이 확 돌변합니다. 병신 같은 것들.

 




밝게 인사도 해 봤지요. 친근하게 말도 먼저 걸어봤습니다. 커피 취향처럼 사소한 것들을 기억했다가 은근슬쩍 챙겨주기도 했고요. 그래봤자였습니다. 다들 내 주위에 오면 무슨 냄새라도 나는 것처럼 미간을 구겼습니다. 형사님은 그런 표정 본 적 없지요? 역겹다는 표정 말입니다. 분명 입은 웃는데 눈은 잔뜩 찡그리고 있습니다. 그 표정이 더 역겹다는 거, 그 새끼들도 직접 당해보기 전까지는 평생 모르겠지요. 그 표정으로 '오늘까지만 나오시면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목소리만 간들어지면 없던 친절이 생긴답니까? 씨발 꺼.


섬 같았습니다. 딱 까놓고 말해서 제가 뭘 또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뭐, 10년 전에 그 년이요? 그건 사고였잖습니까. 그래도 죗값 받겠다고 청송에도 들어갔고. 그럼 된 것 아닙니까? 혀 깨물고 죽기라도 했어야 됩니까?





네, 계속하지요. 먹고살려면 직장이 필요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직업 소개소니 건설업체니 좆 빠지게 돌아다녔습니다. 허탕이었지요. 그러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들른 컨테이너 건물이 거기였습니다. 오십 줄은 됐나, 깐깐하게 생긴 여자 하나가 앉아 있더라고요. 오늘 일자리는 다 끝났는데 혹시 모르니까 휴대폰 번호를 적어두고 가라더군요. 하 ... 휴대폰은 개나 소나 다 있답니까? 내가 지금 휴대폰이 없다, 혹시 모르니 앉아서 기다려도 되겠느냐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 년이 입 딱 다물고 위아래로 훑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과자니까 휴대폰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피가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그 때도 참았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돌아섰습니다.


"요즘은 멀쩡한 사람들이 일 안 하고 쉽게 돈 벌려고 해서 큰일이야."


몸에 남아 있는 혈관들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허름한 문을 발로 걷어차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골목길을 걷는 발걸음마다 짜증이 뚝뚝 흘렀습니다. 개 같은 년. 다짜고짜 근처에 문 열린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소주부터 시켰습니다. 또 식당 주인이 거지 같은 눈깔로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보란 듯이 테이블에 던져뒀습니다. 그제야 소주랑 안주를 가져오더군요. 투명한 소주잔에 또 그 년이 쏘아대던 눈깔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한 입에 털어 넣어버렸습니다. 쌉싸름한 소독 냄새를 삼키니 좀 낫더군요. 한 잔, 두 잔 내리 삼키고 또 삼켰습니다.





식당을 나섰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습니다.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 날따라 하늘이 보라색이더라고요. 원래 노을이 이랬나 싶은 게, 교도소에서 보던 하늘이랑은 비교할 게 못 되더군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잔뜩 구겨진 천 원짜리 두 장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냥요. 그 때 단발머리 계집년이 하나 지나갔습니다. 듣자 하니 서방놈인지, 지 애 새끼인지 통화하는 내내 비실비실 웃는 게 아니겠습니까. 염병할. 저 년은 뭔데 저렇게 신나게 웃나, 니가 나처럼 살아봐야 그 입을 쳐 싸물지, 아래위로 다 찢어버릴까 ... 부모 잘 만나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편하게 사는 인간들에게 따지고 싶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그 때였습니다. 세상모르고 길거리에서 웃음이나 흘리는 그 년한테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따라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어깨를 툭툭 쳤지요. 아 근데 그 년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소리부터 지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씨발, 내가 벌레라도 됩니까? 벌써 몇 번 짼지. 칼을 쓸 것도 없었습니다. 머리 한 대 내리치자마자 고꾸라졌으니까요. 형사님, 그래서 그 벽돌, 찾았습니까?





**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다니엘 글라타우어 소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속 문장입니다. 주어진 문장으로부터 출발한 단편 소설, 전혀 다른 느낌으로 되살아난 문장을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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