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가는 탓인지, 사고의 후유증이 의식의 세계를 넘어 무의식까지 점령한 것인지, 나날이 체력이 약해지고 있다.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홍길동을 능가하며 세계를 오갔던 그녀의 행동반경은 아파트 단지가 있는 작은 골목으로 줄어든 지 오래다. 체력이 문제일까? 어쩌다 볼일이 생겨 지하철 역에 나가면 피로감이 확 몰려오며 귓전에 유난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드르륵 드르륵, 돌돌돌돌...'
캐리어 바퀴 굴러가는 소리. 알록달록 예쁜 스티커로 꾸민 노랑, 파랑 캐리어가 여행객 손에 이끌려 가며 잔망을 떨어댄다. 다른 사람들 귀에도 저 '돌돌돌...' 굴러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까? 미쌍이는 그 소리가 유독 자기에게만 크게 들리는 것 같다. 간혹, 일터나 학교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을 가진 이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캐리어를 바라보기도 한다. 미쌍이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르지만 그들처럼 부러움을 담지는 않았다.
퇴사 후에도 공항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 살고 있는 그녀는 캐리어 바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 동네를 뜨면, 돌돌거리며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 놓는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방비 상태에 오는 편두통처럼 머리가 지근거린다.
19년 동안 비행 스케줄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끌고 다녔던 검은 무게감.
묵직하게 미쌍이의 어깨를 짓눌렀던 검은색 캐리어 가방, Flight bag.
몇 박 이상의 장거리 비행을 가는 날이면 그 무게는 더욱 무거웠다. 가방 안에는 붙박이 용품처럼 항상 있는 메이크업 도구, 세안 용품, 멀티 플러그 같은 잡동사니가 기본적으로 들어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펼쳐봤는지 모를 소설책 한 권까지. 그 안에다 도착지 계절을 고려해 신발과 옷가지, 잠옷을 챙겨 넣으며 사이사이에 비상식량을 끼워 넣었다. 옷 사이에 넣어야 파손될 위험이 적으니까. 다년간 짐을 쌌다 풀었다 해온 노하우랄까. 햇반, 컵밥, 참치캔, 김치라면, 과자 등등 세관에 걸리지 않는 품목으로 챙길 수 있는 것들을 적당히 채웠다.
시차 적응이고 나발이고 그딴 거 할 시간적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전적으로 한국 시간에 따라 잠들고 깨는 몸뚱이를 원망해 봐야 소용없고, 배만 고프다. 시차가 정반대인 타국에서 그 새벽에 주린 배를 달래줄 수 있는 건 이 비상식량뿐이다. 주로 현지에 도착하면 나가서 식사를 하거나 음식을 포장해오기도 하지만 잠을 깨는 시각은 보통 한 밤중이거나 이른 새벽. 포장해 온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고자 해도 그 새벽시간 음식을 챙겨 들고 전자레인지가 있는 공간까지 가기란 여간 귀찮다. 24시간 룸서비스가 되는 호텔 역시흔치 않다. 24시간 편의점, 24시간 무인 카페 등 24시간 영업하는 상점이 즐비한 한국은 굶주린 중생에겐 축복의 나라다.
우버 이츠로 주문했던 음식. 때론 스마트하게~ ^^
여하튼 잘 먹고, 잘 자야 다음 비행도 할 수 있는 승무원에게 비상식량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거기에, 향신료 강한 현지 음식을 못 먹는다거나 지병으로 식단관리를 해야 하는 경우 등 각자의 사정이 더해져, 가방 안에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COOKER(전기를 이용한 조리 기구)를 들고 다니는 승무원도 있었다. 그걸로 밥을 해 먹고, 계란도 삶아 먹고, 떡볶이까지 해 먹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미쌍이 승무원이 과자로 주린 배를 채우는 동안 그 승무원은 진수성찬을 즐겼으리라.
편안한 잠을 위해 개인 베개를 들고 다니는 승무원도 있고, 작은 전기장판에 가습기까지 동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납작한 핫팩 정도는 많이들 가지고 다녔지만 난방이 잘 안 되는 호텔방에서 오들오들 떨어본 미쌍이 승무원은 진지하게 보이로(독일 전기용품) 매장에서 1인용 전기장판을 유심히 살펴봤었다.
한 달에 몇 번씩 잠을 자고 오는 호텔은 나라마다 달랐고, 매번 컨디션이 좋지만은 않았기에 끌고 다니는 가방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질수박에 없었다. 귀찮은 걸 딱 싫어하는 미쌍이 승무원은 최소한의 짐으로만 채워도 그 가방이 버거웠는데, 그 승무원들은 어찌 그것들을 다 매고 지고 다녔을까. 실로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생존의 무게'가 아닐까.
'드륵륵 탁, 드륵륵 탁, 덜덜덜덜...'
무게가 나갈수록 바퀴 굴러가는 소리는 둔탁하다. 가방에 구겨 넣은 짐의 무게에다 긴 시간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더해졌다. 한 아이를 낳고, 또 한 명의 아이를 더 낳으면서 그 무게감은 몇 곱절로 커져갔다.
"엄마, 몇 밤 자고 오는 거야?"
"엄마 가지 마! 엄마 못 가. 엉엉..."
현관문 앞에 서서 온몸으로 미쌍이를 막아 세우는 어린 두 아이들. 여린 눈물들을 뒤로하고 나서는 비행은 검은 무게로 그녀를 잡아세웠다. 둔턱에 걸려 탁탁대는 캐리어처럼 나를 자꾸만 돌아보게 하고,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러다 결국엔 더 이상 덜덜거리며 끌고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고. 그 무게가 너무 버거웠나 보다.
지금은 훌훌 던져버린 캐리어 가방이지만 '덜덜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선다. 택배 아저씨의 끌차 소리에도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가며 뒷목이 뻐근해지는 나를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난다. 승모근이 딱딱하게 솟을 정도로 끌고 다닌 19년의 시간만큼 그 무게를 덜어내는 데도 시간이 걸리겠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를 탓하며 애꿎게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