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수납전문가입니다
정확한 시기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도 꿈 많던 여중생 시절쯤이었을 것 같다.
어디서 생겼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무튼 예쁜 편지지가 하나 생겼다.
아주 연한 핑크색 바탕이었고 오른쪽 아래 구석엔 예쁜 장미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때의 내 눈엔 '세상에서 이렇게 예쁜 편지지가 있을까' 싶어 보였다.
너무 예뻐서 이걸 아무나에게 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진짜로 이걸 받아 마땅한 사람이 생기거든 그 사람에게 쓰려고 나름 소중히 간직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편지지를 받아 마땅한 사람은 쉽게 나타나질 않았고 세월은 자꾸만 흘러갔다.
그러다 드디어 때가 왔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그 편지지가 내 맘을 전해 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오랜만에 꺼내 본 편지지는 절대로 그 역할을 해낼 수가 없었다.
세월의 직격탄을 맞았는지 딸기우유처럼 뽀송하던 핑크색은 누런과 핑크가 결합된 애매한 색이 되어 있었고 베일 듯 날카로웠던 종이의 테두리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무딘 느낌이 되어 있었다.
아...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정말 하늘도 무심하시다.
아끼고 아끼던 그 편지지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그냥 종이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차라리 일찌감치 곁에 있는 친구에게 방학 때 쓰던 편지에 사용했더라면 그 예쁜 편지지를 받은 친구를 감동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정리를 하다 보면 유행은 한참 전에 지났는데 아직 박스에서 나와 본 적도 없이 나이만 들어버린 새 물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박스에서 나오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개는 어느 날 도래 할 '좋은 날'을 위한 대기시간인 경우가 제일 많다.
그릇으로 예를 들어보자.
이미 충분히 많은 좋은 그릇들을 사용하고 있을 땐 그나마 아까운 마음이 덜하지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 짝도 안 맞고 이도 나가고 '임시'생활 같은 느낌이 들 때는 박스 속 새 그릇이 정말 아깝다.
박스를 탈출했더라도 장식품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정말 많다.
나도 일찍이 그런 마음이 있어봤으니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정말 좋은 걸 나눠야 할 대상은 어쩌다 방문하는 손님이 아니라 늘 나와 함께하는 가족들이 아닐까? 제일 깨끗하고 좋은 반짝반짝 빛나는 그릇은 나와 내 가족이 제일 먼저 누려야 한다.
치약, 비누, 샴푸가 사용기한이 한참 지난 것과 기한이 남은 것 몽땅 보관하며 늘 한참 지난 것부터 쓰는 경우도 너무 많이 본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늘 최상의 상태를 넘겨 사용하게 된다.
'아깝다'가 그 이유 일 텐데, 그렇다면 늘 사용기한을 지나 쓸 것이 아니라 최상의 상태일 때 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너무 지난 것은 폐기하고 좋은 것을 쓰거나 아까워서 폐기할 수 없다면 좋은 것을 나누기라도 해야 한다.
서랍이 넘치도록 새것을 두고도 낡은 속옷을 입고 보풀 가득한 양말을 신고 있지는 않은가?
좋은 건 지금 써야 한다. 물건이든 마음이든.
아끼다 똥 된다.
내일은 당연히 올 것 같지만 꼭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좋은 걸 쓰기에는 오늘이 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