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이 Oct 10. 2024

<너는 내 미션> 5. 마음속 목소리 vs 사실

#교실이야기 #연작소설 #사실과 느낌 구분이  어려워 #에세이느낌의 소설

스포츠 팬이면, 한 번쯤 좋아하는 선수의 사인을 받길 원하다. 종이가 없어도 괜찮다. 다른 곳에 받아도 충분히 의미가 있으니까. 공, 신발, 모자, 손바닥도 기꺼이 내주는 게 팬심이기에 어디라도 상관없다.  


내 최애의 사인을 위해서라면 지금 입고 있는 옷의 등짝도 내어주는 게 팬이다. 그 선수의 유니폼을 갖고 있다면 더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쁨을 모르는 친구들도 있을까?


있다.


어린아이들은, 가족들이 스포츠 선수의 열렬한 팬이 아니라면 그 기쁨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라 이곳저곳에서 이름을 자주 접한 경우가 아니라면 더욱 내 최애 선수의 사인을 자랑하고 싶은 친구의 마음을 예상하기 힘들다.


어느 날, 나의 미션  그 아이는 멋진 농구 유니폼을 입고 왔다. 누가 봐도 사이즈가 큰 유니폼이지만 옷 위에 굳이 겹쳐 입고 온 이유가 있었다. 검정 매직으로 선명히 남겨진 선수의 사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농구 팬도 아니고, 아는 농구 선수 이름도 없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그 아이의 마음은 엿볼 수 있었다.


누군가 내 유니폼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 사인받은 유니폼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그 아이의 걸음걸이에서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 유니폼은 등교 후 5분도 되지 않아 벗겨졌다.


 즐거운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유니폼을 벗으며 눈물을 뚝 뚝 흘리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직접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에피소드는 한 친구의 친절함 때문이기도 했고, 무심함 때문이기도 했으며 무지함이기도 했다. 당사자 아이는 "저 아이가 나를 무시하고 놀렸어요!"라고 말하며 서러운 표정을 짓는다. 상황은 이랬다.


농구유니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아닌 사인의 정체를 알리 없는 한 여자친구가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야! 네 옷에 낙서 있어"  


낙. 서. 라. 니!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기뻐해준 내 최애 선수의 사인을 낙서라니! 남자아이는 화가 많이 났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친구가 나를 무시했고, 우습게 여겼고, 놀렸다며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낙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선수의 사인이라고 설명하면 될 일을 왜 저렇게 과잉반응 하는 걸까 하며 의문이 든다면, 당신은 어린이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심리를 모르는 어른임이 확실하다.


그 아이는 자신 있게 친구에게 농구 유니폼을 설명할 힘이 없었다. 낙서가 아니라 사인이라며 너는 이것도 모르냐며 오히려 친구를 무안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아이는 평소 자신감이 부족해서 쉽게 위축되는 아이였기에 '낙서'라는 말에 당당히 맞설 수가 없었다.


여자친구는 황당해서 잠시 입을 살짝 벌리고 그대로 멈췄다. '무엇이 잘못된 거지?' 하는 마음으로 나를 쳐다보는 소녀는 정말로 남자아이가 왜 저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이다.






여기서  내가 가장 확실히 확인해야 할 일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학생의 마음속 목소리를 구별해 내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일수록 귀로 직접 들은 말과 그 말을 듣고 떠오른 자신의 느낌을 섞어서 상황을 설명한다.


일부로 그런 것은 아닐 거다. 논리적인 말이 어려운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의식의 흐름처럼 이야기한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올라온 감정에만 집중하다 보니 친구와 있었던 사실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때 마음속에 떠오른 자신의 생각을 먼저 이야기하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 늪에 어른들이 빠지면 안 된다.



"네 옷에 낙서가 있어" 이 말이 "너는 낙서가 된 옷을 입고 온 바보 같은 아이야"라고 들린 거다.


나는 변호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니고 판사도 아닌 교사이기에 아이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다 믿기 전에 그 말의 출처를 꼭 확인해야 한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자신의 생각인지 구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마치 과학시간에 혼합물을 분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아이들의 마음속에 엉켜 있는  감정혼합물을 분리해줘야 한다. 그래야 이 에피소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꼭 해야 하는 일! 네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어. 오해할 수도 있어. 순간적으로 화가 나면 눈물이 나고 속상해서 친구가 일부로 나를 놀리려고 그랬구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안 좋을 수 있어.라고 공감해 주는 일이다.


실제로 아이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 주되,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는 일은 때때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지만 이 과정이 없으면 학생과 교사 사이에서의 중요한 라포도 지켜내기 힘들다.


갈등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서로 이해가 되면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지 않아도 대화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서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울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리고 꼭 친구의 이유를 들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회 없이 교사인 내가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말을 많이 하게 되면 탈이 난다. 학교에서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자신의 단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말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사람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누군가에게 의지해 이 상황을 풀어나가려고 하거나, 잔뜩 상대를 오해한 채로 이 세상에 내 편은 없다고 믿게 된다.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상처 주는 일이 안 그래도 많은 이 세상, 아이들이 학교에서부터 차근차근 안전하게 교사와 함께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엄청난 에너지와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고 아이의 섬세한 감정을 지나치지 않아야 하는 예민함도 장착해야 한다.




어찌 됐든, 여러 가지 이유로 "네가 사과해, 네가 사과해야 하는 일이야"라고 단호하게 말하기 힘든 사회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나는


요즘 아이들에게, 서로의 입장에서 대화를 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일을 한다. 이때 머뭇거리고 어색해서 첫마디를 시작하지 못하는 친구에게는 간단히 "내가~라고 말을 시작해 보렴. 선생님한테 말했던 것처럼 너의 입장을 친구에게 이야기해 보렴" 하며 힌트를 준다.


그리고 자기 말만 하고 아이들이 대화를 끝마치지 않도록 서로의 말을 잘 들었는지 확인해 준다. 억울한 건 없는지 더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어보며 마무리를 하면 나도 속 편하게 에피소드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교사는 누구를 혼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알려주고, 여러 상황에서 사람들과 겪는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해 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연습시켜 주는 존재다.


그것이 교육이고 교사의 존재가 매우 중요한 이유다. 오늘도 마음속 목소리와, 있었던 사실을 구별하는데 서툰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 



한 번 이런 일을 겪으면, 아이들은 비슷한 일을 반복하지 않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아직 멀었다. 두 발로 서서 자유롭게 걷고 뛰기까지 아이들이 얼마나 수백, 수천번 넘어졌는가. 이 과정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서로의 입장이 바뀐 채로 나를 찾아오기도 하고 다른 상황에서 응용하지 못하고 찾아오기도 한다. 물론 나를 만나기 전에 이 연습을 많이 한 친구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그 아이는 오늘도 날 긴장시킨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학교에 출근한다.


 






이전 04화 <너는 내 미션 >4. 선착순이 문제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