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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루 루루루루루 루/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는 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70년대 초 상아탑이 흔들린 채, 매캐한 최루탄으로 인해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켐퍼스를 드나들던 그 무렵 학생들. 지금은 호호백발이 되어 이 노래를 휘파람으로 날리며 이 공원을 거닐고 있겠지. 그 무렵 나는 아빠가 되어 있었지만, 그 이전 60년대 초 나도 바로 여기에 뜨거운 눈물을 뿌리곤 했다. 이곳 터줏대감들이 싹쓸이하던 시절, 그들과 힘겹게 실력을 겨루던 고사장이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의 캠퍼스였다. 청운의 꿈을 안고 연례행사처럼 이 곳을 드나들었지만, 짧아서 귀하다는 청춘을 여기에 묻고, 사랑의 달콤함도 맛보지 못한 채 흘려보냈다. 모교는 아니지만, 합격과 낙방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면서, 나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점철된 마로니에 아래서, 나도 지금 이 노래를 휘파람으로 날리고 있다.

마로니에! 나도밤나무과에 속한 낙엽교목인 이 나무는, 아름다움과 휴식과 정의 싱징이라고들 한다. 일제 강점기인 ’29년 당시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심었다니까 팔순이 넘은 우람한 고목이요, 최루탄으로 눈물 범벅이 되었겠지만 여름엔 어김없이 잎이 청청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손짓하여 그늘 방석을 깔아 주며 쉬도록 한다. 비록 늙었지만 나도 심심하면 훌쩍 집을 나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을 찾아온다. 아련히 피어오르는 지난 추억을 더듬기도 하지만, 보다 젊은 피를 수혈하기 위해서.

비린내는 나지만 싱싱하게 파드닥거리는 생선 같은 저 에너지가 부럽다. 휩쓸리기는 하지만 야수같이 거친 젊음의 파도가 자랑스럽다. 풋내는 나지만 툭 터질듯이 팽팽한 얼굴에 활짝 핀 웃음이 또한 그립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왜 젊었을 적에 지금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샘터파랑새극장 앞 조형물에 쓰이어진 이 말에 가슴이 찡하다. 사람이란 것 외에는 하나도 같은 게 없는 모습들....저마다의 패션을 자랑해 보이는 행렬 속에 나도 한통속이 되어 끼어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겁다.

계단식 기둥과 중심부 원반형의 ’97년 연극제 기념 ITI문을 지나면 곧 아르코미술관. 그 앞에 마로니에와 서울대학교유지기념비가 있으며, 오른쪽으로 야외무대가 있다. ‘문화예술 사랑의 숨결이 모여 새롭게 꾸며진 마로니에공원’이라 했듯이, 마로니에공원은 곧 예술의 공원이다. 옛 서울대학 본관도 예술가의 집으로 명명,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간판이 붙어있고, 정문 앞의 ‘여명’‘두여인’ 조각품이 아름답다. ’85년 정부 주도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이화동 사거리까지의 1.1Km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조성, 50여 개의 소극장과 500여 개의 카페가 밀집해 있다고. 아르코예술극장 앞에는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흥미롭게 하는 것’이라는 글이 크게 나붙어 있다.

각종 공연물 광고가 눈을 부시게 하고, 이를 홍보․안내하는 젊은이들로 흥청거린다. 아마추어 연예인들과 구경꾼들이 왁자지껄하게 북새통을 이루어, 국적도 알 수 없는 자유분방한 문화가 모자익되어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긴다. 인공 연못과 실개천, 분수와 정원이 마련되어 있다. 김상옥열사의 동상과 의거비,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비석, 애국가의 현판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눈여겨보는 사람 없이, 자연주의는 인문주의에 가려지고,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에 덮여 있는 것 같다.

한발자국 거리로 나오면 즐비한 잡동사니와 먹거리 가게, 철학관 간판을 붙인 사주․궁합․점쟁이...즉석 초상화가와 거리의 악사, 자칭 개그맨과 나가수....2004년 인사동에 이어 ‘문화지구’로 지정한 바 있는 마로니에공원이야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진 문화마당이요, 젊은이들의 풍류마당이다.

타고르의 흉상과 시 ‘동방의 빛’, 함석헌의 시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는가?’, 김광균의 시 ‘설야’, 돌병풍에 새겨진 9개의 하회탈....이들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를 법도 하건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할 일이 바빠서 일까? 애타게 누굴 만나기 위해서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날개는 없어도 바람결을 가르며 훨훨 날고 싶은 젊음, 지느러미는 없어도 물살을 가르며 싱싱 헤엄치고 싶은 정열 때문이겠지. 이렇게 후끈 달아오른 열기를 담아, 공원은 한낱 팽팽한 열기구가 되어 공중에 둥둥 떠다닐 것 같다. 하지만 마로니에는 열기를 시원하게 식히는 냉각기이다.

한편 한 발자국만 골목으로 접어들면 여울은 잠잠해진다. 이 소극장들 안에서는 노래와 춤, 웃음과 눈물, 한숨과 외침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저 커피숍에서는 차를 마시며 커피 향내 같은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이 있다. 저 카페에서는 술잔을 부딪치며 얼큰하게 담론하는 친구들이, 저 음식점에서는 오붓이 식사하는 가족들이 있다. 그런데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홀로 거닐고 있는 나는 불현듯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는 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 루루루루루 루/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야흐로 마로니에는 어둠의 자락을 끌어당기고 있는데,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아래서, 술 없어도 취하는 청춘 남녀들이 낭만을 노래하며, 한쪽 벤치에는 만취한 노숙자가 코를 골고 있구나. 아, 마로니에공원의 명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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