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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봄철 꽃보다 가을철 단풍이 더 곱다고 했지. 하늘공원에서 내려다본 평화의 공원은 한 폭의 전원 풍경화이군.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의 눈짓만으로도 끌려갔다. 무지개다리를 지나 졸졸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걷는데, 코가 벌름거린다. 수수한 들꽃 같은 젊은 연인들에게서는 은은한 들국화 향기가, 은빛 억새꽃 같은 노 부부들에게서는 검버섯 핀 모과 향이 풍긴다. 그런데 홀로 쓸쓸하게 걷고 있는 나에겐 행여나 오래 묵은 김치의 군내가 나지나 않을까? 그리스 출신의 샹송 가수 조르주 무스타카가 ‘고독은 나의 친구’라며, ‘고독과 함께라면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라고 노래했는데....

평화광장에 ‘lotus’라는 푯말과 함께 연꽃 조형물이 놓여있군. 고대 인도 민족은 연꽃은 여성의 생식기로서 힘과 생명의 창조를 뜻하였다고. 한편 그리스 신화에서는 로터스 열매를 먹으면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잊고 즐거운 꿈을 꾼다는 망우수(忘憂樹)라 했지. 따라서 lotus land라면 동양에서의 무릉도원인 셈인데, 지금 난 무릉도원에 온 것이다.

홍보관과 유니세프 광장을 지나, 난지호를 끼고 산책로를 걷다. 모두들 짙어가는 가을 정취에 푹 빠져 마음도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 있다. 바야흐로 그늘진 산책로가 스산한 느낌이 드는구나. 머지않아 조락의 계절. 불그무레한 저녁놀을 배경으로 이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땅에서 구르면, 또 한 해가 저물겠지. 새들의 지저귐이 아니면 가슴이 뻥 뚫릴뻔했다. 불현듯 감상에 젖어드는데 시가 흐르는 광장이라. 열네 분의 시가 나무에 걸려 있네. 온통 10월과 가을에 관한 시이고보니, 나도 시의 계절에 시인처럼 시를 읊조리며 시의 마을을 거닐고 있다.

이리저리 개울굽이가 한층 공원을 정겹게 하는군. 하루 약 5,000t의 한강물을 끌어올려 난지호를 이룩한 것이라고. 이 호수의 한강 복류수(伏流水)를 활용한 친수공간을 조성하여, 전원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난지호의 물은 자연스럽게 조성된 지형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난지천공원을 적신 후 다시 한강으로 흘러간다는 것. 자연을 벗삼아 이곳을 자유롭게 거닌다는 것이 여간 행복한 게 아니다.

평화의 다리․평화의 정원․평화의 잔디광장.... 인류의 염원을 한 마디로 오붓이 담아놓았구나. 지금도 신문에는 인종․종교․이념․영토 등 갈등으로 인해, 테러와 전쟁․내란 기사가 빠진 날이 없지. 특히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 전원이 ‘평화’ 피켓을 들고 휴전선을 따라 행진․시위한다 해도, 분단된 한반도에서 가까운 장래에 화해와 평화가 올 것 같지 않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라는 성경 구절(이사야2:4,미가4:3)이 UN본부 빌딩에 새겨놓고, ‘세계평화의 날’(9.21, 1982)’까지 제정한 UN의 노력도 한계에 부딪치고...월드컵 대회의 정신이 사랑과 우정이요 평화인데, 발로는 공을 차고, 손으로는 포탄을 쏘는 현실이 씁쓰레하다.

어린이 놀이공원에서 잠시 본 아이들도 욕지거리와 손찌검이구나.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성경(창8:21) 구절이 생각난다. 하버드대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거의 저서 ‘우리 본성의 더 나은 천사들’에도, ‘갓난아기들은 여전히 물어뜯고 발길질하고, 꼬마들은 싸움 놀이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전쟁과는 작별이라는 식의 해석은 오해’라고 하였다. 한편 스페인의 내전을 연구하던 조드 박사도 전쟁의 배후엔 사탄의 역사임을 발견하고, ‘세상은 놀이터가 아니라 전쟁터다’라고 하였지.

열대여섯 개의 장승 앞에 섰다. 눈썹을 치켜세운 채 눈을 부라리며, 이를 온통다 들어낸 맹수 모습의 장군만 있을 뿐, 하회탈 같이 파안대소하는 평화의 사도 모습은 한 개 뿐이군. 라틴어 격언에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대비하라’는 말이 있지. 하기야 힘의 균형이 전쟁을 막는다는 게 국제사회의 논리요, 북한과의 비대칭 전력이 무력 도발을 유발하므로 군비를 증강하자는 게 우리 한국의 현실인데, 영구평화는 공염불일 뿐이지.

수생식물 전시장의 물레방아는 잘도 도는구나. 휠체어를 타고 나들이 온 은발의 노인네들이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얼추 보아 6.25전쟁 상이용사들이다. 포화 속에서 평화를 갈구했던 이들의 눈에, 저 물레방아의 헛노릇이 지금은 평화롭고 낭만적이겠지. 하지만 꿀벌 꽁무니에 독침이 있듯이, 전쟁광일수록 평화 공세에 능수능란했다는 걸 잠시도 잊은 적이 없는 세대들로서, 비둘기가 물고 있는 평화의 월계수가 한낱 위장망이었던 것을 뼈저리게 겪었지 않았던가?

피크닉장으로. 호수면과 맞닿은 반원형 목재데크의 프롬나드(promenade)광장. 호수에서는 분수와 더불어 노니는 오리 떼들, 천진난만한 아이들 틈에서 는 되똥거리는 비둘기 떼들, 돗자리를 깔고 오순도순 도시락을 먹는 가족들...아, 평화롭다! 저 아이들을 다시는 전장으로 내몰지 않아야 하는데....문득 ‘돌아가신 부모의 장사를 치루는 시대가 평화이고, 부모가 자식의 무덤을 파야할 시대를 전쟁이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이 생각난다. 연이어 독일 여성 미술가 케테 콜리츠의 ‘전쟁’ 연작 시리즈가 떠오른다. 살라고 낳은 아이를 전장에 보낸 어머니의 석판화는, ‘부조리한 전쟁과 모정의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인데, 이를 완성한 이틀 후 전사통지를 받았다는 것. 이것이 냉엄한 역사가 아닌가? 한편 ‘정당한 전쟁론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정당한 전쟁론이란 적실성을 잃었다’고 주장한 토마스 머튼의 ‘평화론’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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