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생활 에피소드
나머지 일지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볼까 한다. 퇴원 전까지는 정말 열, 통증, 염증과의 싸움이었고 별다른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이체질인지 아세트 아미노펜이 별 효과가 없었다. 통합 간호병동이라 간호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특히 열이 나는 나에게 많은 신경을 써줬다.(간호사들 입장에선 짜증 났을지도..) 아세트 아미노펜을 맞고 나면 잠시나마 열이 떨어지긴 하였으나, 37.5도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약 3시간이 지나면 열이 39.4도를 기록하곤 했었다. 사실 어딜 돌아다니지 않고 침대에만 누워있으니 어지럽지도 않고 별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다들 심각해했었다. 이렇게 열이 안 떨어지면 간호사분들은 얼음 팩 2개와, 엉덩이 주사를 가지고 와서 놔줬다. 뭔가 아주 강한 진통해열제라고 했는데 무엇인지 기억은 안 난다. 그걸 맞고 나면 멍--해지지만 열이 금방 내리고 통증도 많이 줄어서 좋았다.
아침 채혈 결과는 염증수치와 백혈구 수치가 매번 높다고 나왔다. 정상수치의 13배였나. 염증수치가 17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비장이 죽어가며 염증물질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코로나나 수술 후 염증수치에 대한 예방적 차원으로 항생제를 맞았는데 별 소용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염증수치는 일주일이 지날동안 변동 없었다. 덕분에 아주 독한 항생제를 일주일 동안 맞았다. 비장이 어느 정도 죽어가서 일까? 시술 후 10일이 지나니 염증수치가 유의미하게 내려가고 있었고, 퇴원 시에는 일반인의 2배 정도 수준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
간단한 비장 동맥류 시술의 경우 3일이면 퇴원할 수 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교수님 말에 따르면 첫째, 비장이 너무 거대했던 점. 둘째, 본 시술 계획은 부푼 혈관의 동그란 부분만 막는 것이었으나, 아예 주 동맥이 막을 수밖에 없었던 위치인 점이었다. 쉽게 말해 10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케이스에 당첨된 것이다.
강북삼성병원의 경우 5F 층은 중환자실이 위치해 있고, A관 ~ C관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실내 산책로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 같은 경우 같은 병실의 환자분께서 알려주셨는데, 병동에만 있는 게 불쌍해 보이셨는지 알려주어 인지하게 되었다. 길이는 약 300~400m 정도 될까? 오르막 내리막도 있고, 링거 카트를 끌고 슬렁슬렁 다니다 보면 땀도 나고 운동도 됐다. A관~C관으로 통하는 길에 의사나 간호사분들이 그린 그림이나 시를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주변에는 생각보다 소파나 의자들이 많아 쉬었다가 가기도 좋았다. 또, 5F 중환자실 인근에는 [야외 테라스]가 위치하고 있어 가끔 책 읽을 때 가서 읽곤 했다.(열이 수시로 올라 오래 있진 못했다) B2F(지하 2층)에는 편의점과 카페, 본죽이 있었다.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게 외부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편의점에서 파는 김이 아주 맛있었다.
병원 밥은 식사시간이 되면 배식원분이 식사를 가져다주셨다. 다 먹으면 수거하러 오시거나 가져다 놓으면 됐었는데 너무 아파 밥을 안 먹었던 날엔 간호사분께서 이를 대신해 주셨다. 시술 후 며칠이 지나고는 밥을 못 먹겠으면 미리 이야기해서 밥값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했다. 한 4일 후에는 죽부터 시작해서 먹을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김을 사다가 먹기도 했으며, 점심시간에는 반찬이나 밥을 고를 수 있었다. 난 보리밥을 좋아해서 보리밥으로 시키곤 했는데 가끔 쌀밥으로 잘못 나왔던 것 빼고는 생각보다 맛있는 반찬이었다.(잘 못 나온 것도 나중에 다시 가져다주시더라)
내가 있던 7 병동은 간호사 통합간병서비스를 제공하는 병동이었다. 코로나 시기였던지라 보호자는 [수술] 자에 한해서만 하루 정도 있을 수 있었고 [시술] 자는 불가능했다. 강북삼성병원의 간호사분들은 대부분 친절했는데 진상 환자들로 고생하는 것 보면 안타까웠다. 그런 상황 속에서 간호사분들이 어벙한 신입 간호사를 혼내는 소리도 들었다. 문화가 많이 개선되어서 태움 수준은 아니었지만, 요리조리 잘 갈구는 것 같았다. 왜 혼날 수밖에 없었는지의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진통제와 항생제 링거를 맞고 있는 팔에서 채혈했기 때문이다. 난 "이 방법이 맞나요?"라고 말했고 그 간호사분은 "네 가능해요"라고 했다. 아마도 그분은 채혈 솜씨가 없었고, 난 채혈하기 매우 어려운 사람이었으니 혼나지 않기 위해서였으리라.. 왜 그런 거 있지 않는가 선임에게 갈굼 받기 싫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 이후에 다른 간호사에게 해당 방법이 맞느냐 재차 물었는데, 당연히 아니라고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뭐, 그러려니 했다.(당일 수치는 달랐겠지만)
통증은 정말 심했다. 시술 후 이틀까지는 숨 쉬는 것조차 아파서 학- 학-대며 지냈고, 그 이후는 비장 근처가 아파 돌아눕거나 걷기가 힘들었다. 특히 변이를 느끼고도 배에 힘도 못주고, 가스가 차서 빵빵하게 부풀었을 때는, 고통이 배가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교수님께서는 원래 이렇게 아픈 거라며 조금 있으면 괜찮아진다고 하셨는데, 예상보다 통증 회복속도는 더뎠었다. 통증이 본격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6일째까지는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참고 또 참아냈다. 통증으로 침대에 누워 핸드폰도 못할 지경일 때는 명상을 많이 했다. 심호흡을 통해 호흡에 집중하고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덕분에 통증이 나아지면 진통해열제 효과와 함께 잠이 들곤 했다.
통증과의 사투를 하는 동안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당시 아이가 어렸기에 통증을 참을 때 아이와 가족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간사하게도 지금은 이전과 같이 돌아 간 듯 하지만, 당시만 해도 병상에서 가족들에 대한 다짐, 소망을 혼자 풀어내곤 했다. 난 그동안 가족보다는 일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일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게 여기가 되었다. 지인들, 친구들도 있지만 결국 내가 가장 아플 때 찾고 걱정해 주는 사람은 가족뿐이었다. 가족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부터 이틀에 한 번씩은 찾아와 얼굴이라도 보고 갔는데, 먼 길 오느라 초췌하진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까웠다. 독박육아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별다른 내색 없이 항상 예쁘게 꾸미고 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가족에게 너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