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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첫 책은 <웃긴 책, 화 풀어주는 책>

안녕하새요 개그맨잎니다.

by 알쏭달쏭

이제 6살인 첫째 딸 제리가 포스트잇 앞에

[웃긴 책, 화 풀어주는 책]이라고 써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걸 아침마다 보여주면 엄마가 화를 내지 않을 거야"

라고 말했다.


등원 준비할 때 유독 예민해져서 아침마다 화를 내는 엄마를 위한 우리 딸의 첫 책이다.


그러면서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

[안녕하새요. 개그맨잎니다]라고 써서 본인 배에 붙이며 웃었다.

엄마를 웃겨줄 수 있는 개그맨이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찌릿하면서도 간질간질했다. 유치원에서 한글을 배워서 이제 글을 조금씩 쓰고 있는 데 맞춤법이 다 틀려도 본인의 마음을 엄마에게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엄마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딸로 태어나서 많은 걸 견뎌내고 사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진짜 화내지 말아야지. 우리 딸들 가슴에 작은 생채기도 내지 말아야지.'


라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한 거라곤 아이를 낳은 것 밖에 없는데 나 같은 사람이 이 귀한 딸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아이는 엄마의 행복을 바라며, 본인이 엄마의 화를 풀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고 있었다. 엄마가 자신으로 인해 웃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도 느껴졌다.





제리가 4살 때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기부저금통을 받아왔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동전을 모아 제리이름으로 기부한다는 취지였다.


"엄마 기부가 뭐야?"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도와주는 거야"

"그럼 여기에 동전을 모아서 엄마한테 줘야겠다."

"왜?"

"엄마가 제일 힘든 사람이잖아."


제리의 말을 듣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에게 티를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엄마가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고작 4살밖에 안된 아이가! 엄마가 힘들어할 때마다 제리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내가 괜찮아져서 아이 마음에 '엄마가 힘들었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때로 힘들었을지라도 대부분 웃으며 행복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2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잊지 못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일화였다.


나는 너희를 통해서 또 한 번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분명히 알아주길 바란다.


아이를 낳았는데 나와 상당히 닮아있었다. 사실 내 얼굴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나와 똑같이 생겨서 태어난 게 아니겠는가? 아이를 사랑하면서 내 얼굴도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으면 그냥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생겼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새도 없이 말이다. 작고 속쌍꺼풀진 눈, 좁은 미간, 내려간 눈썹, 동그란 콧구멍, 인디언보조개를 보며 어쩌면 나와 이렇게 똑같을까 신기하면서 미친 듯이 사랑스럽다.


아이는 사랑하려고 낳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사랑받으려고 낳은 것 같다. 내가 주는 사랑보다 아이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훨씬 크다고 느껴질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방금 뭐가 그리도 서운한지 서럽게 제리가 울었다. 이유는 정말 티끌보다 더 사소하다. 엄마 팔을 만지며 자고 싶은데 아빠방에서도 자고 싶다는 이유에서 시작된 울음이었다. 상충되는 두 소원을 충족할 순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코가 막혀서 더 슬퍼지고 눈물이 나게 되었고 숨이 안 쉬어진다는 이유까지 번져나갔다. 이대로 울다간 잠을 못 잘 지경으로 셀 수없이 이유가 무한발생할 것만 같았다.


나의 평소모습이었다면

"무슨 그런 이유로 울고 그래. 운다고 해결되지 않아. 그만 울어. 야!!!!! 그만 울랬지!!!!!"

하면서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딸은 [웃긴 책, 화 풀어주는 책]의 저자이며 [안녕하새요 개그맨잎니다]라는 사람이다.


"제리야 엄마가 아침마다 화를 내서 엄마 웃게 해 주려고 웃긴 책 화 풀어주는 책을 썼지? 엄마가 이제 개그맨이 돼서 제리를 웃게 해 줄게."


라고 말했더니 제리가 울음을 멈추고 웃었다. 제리도 이럴 때 보면 그냥 천상 아이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나는데...


여하튼 내가 개그맨이 되는 건 제리를 웃게 해 주는 일이었다. 마음이 좀 풀린 모양이다. 웃다가 다시 또 울긴 했지만 계속


"나는 개그맨입니다. 나는 웃긴 책 화 풀어주는 책입니다."


라고 울 때마다 이야기했더니 제리가 또 웃었다. 웃음포인트를 찾았다. 위로와 공감보다 생각의 전환이 제일 잘 먹힌다는 걸 배웠다.


나는 오늘도 딸에게서 삶을 배웠다. 엄마가 화를 내면 웃게 해 주는 책을 보여주겠다는 딸의 말대로, 아이가 화를 내면 내가 개그맨이 되어야겠다. 이쯤 되면 딸이 엄마의 스승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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