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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환 Mar 20. 2024

고운 빛 꽃이 된 또 다른 가을 풍경 해파랑길 8코스

방어진항 가을 이야기

울산 큰 애기로 상징되는 인 서울(in seoul)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에서 나왔다. 해파랑길 3차 원정 사흘째 이른 아침 성남동 ‘젊음의 거리’를 걸었다. 숙소에서 나와 길 건너 GS편의점과 119 안전센터 사이의 상가 골목에 구조물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 씌운 아케이드 거리였다. 


성남城南이란 지명은 과거 읍성이 있었던 때 읍성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에 붙은 지명이다. 북정동, 교동, 성남동, 옥교동 일원이 조선시대 울산읍성蔚山邑城이었다. 과거 1765년(영조 41) 상부내면에 속하는 주부리(主部里)와 남문내리(南門內里)였고, 1962년 6월 울산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성남동이 된 마을로, 태화강변 도심 중구 성남동은 1969년 김상희가 불렀던 ‘울산 큰 애기’가 탄생된 울산의 원도심이다. 


경희가 거리를 걷다 팔짱을 끼고 서있는 상냥하고 복스러운 울산 큰 애기 마스코트 옆에 서서 찰떡같이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웃었다. 왼쪽 입꼬리가 올라간 익살스러운 울산 큰 애기 표정을 따라 하며 환하게 웃던 경희의 그럴싸한 포즈에 원피스만 입었다면 똑같았을 것이라며 다들 아침부터 웃었다. 


‘울산 큰 애기’는 그들이 어렸을 때인 70년대 머리 깎으러 이발소에 가면 커다란 거울 아래 놓여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오던 노래였다. 한동안 ‘울산 큰 애기’란 말이 입에 착착 달라붙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나이였기에 뜻을 알 턱이 없었지만,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 애기~’를 흠집 난 레코드판(LP판)이 제자리를 돌며 반복적으로 재생되듯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곤 했던 기억이 발 밑에 아른거리는 그림자만큼이나 어렴풋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경희의 환한 웃음 속으로 들어간 그는 그렇게 50년 세월 저편으로 걷고 있었다.


한국전쟁 후 폐허나 다름없는 곳에서 힘겨운 삶을 일궈야 했던 1960년대 우리 사회의 빈곤한 가장과 형제자매들은 먹을 것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변변한 옷 쪼가리조차 충분하지 못했다. 마치 붉은 산자락이 그대로 드러난 마을 뒷동산만큼이나 헐벗은 삶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전후 복구로 지은 좁고 비위생적인 판잣집에서 살아야 했고,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엔 작고 빈약하기만 했던 하꼬방(상자를 뜻하는 일본어 '箱はこ(하꼬)+방', 6.25 전쟁 전후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지은 매우 작은 칸막이 판잣집방)으로 기차소리 같은 통바람이 숭숭 드나들었고 윗목 냉골에 놓인 물 대접이 꽁꽁 얼어붙던 시절이었다. 교육과 의료 서비스는 용어 자체가 딴 세상 이야기였으며, 복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만큼 바닥상태나 다름없었고, 광복의 꽃이 피기도 전에 전쟁이 가져다준 빈곤의 그림자는 걷힐 것 같지 않았던 사회였다. 


그는 국민학교 1학년 입학할 무렵, 함석지붕이 덮여 있던 집으로 이사했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린 마음에도 상표가 그대로 남아있는 알록달록한 깡통이 덮여 있던 집을 보며 지붕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던 기억이 마치 어제일처럼 선명했다. 보기에 따라 알록달록했고 울긋불긋한 함석의 정체는 미군들이 마시고 버린 캔맥주 깡통을 펴 이어 붙여 만든 함석이란 것을 얼마쯤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인근 탑 거리 근처 서부시장엔 둥근 쇠파이프에 캔맥주 깡통을 펴고 접어 함석을 만드는 철공소가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철공소 아저씨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던 하굣길 소년은 깡통이 널따란 함석이 되는 과정을 보고 지붕에 덮인 함석이 이곳에서 만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셈이었다. 철공소 한편엔 맥주 깡통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함석으로 지붕을 이은 그 집은 그의 어머니 아버지가 처음으로 장만한 집이었고 평생을 고치고 또 고쳐 새로 지은 집이었다. 어느 날 울긋불긋 함석지붕은 회백색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진흙벽은 블록과 벽돌로 바뀌었다. 그리고 중3 무렵 즈음, 그러니까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으로 빈곤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을 무렵인 1973년 기존 집을 헐고 새로 지었던 아버지의 유일한 집이었다. 지금 와 당시를 회상해 보면 경제개발에 따라 먹고사는 형편이 나아지면서 집의 모습도 함석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고 진흙집이 벽돌집과 옥상이 있는 슬래브 집으로 바뀌었던 셈이다. 당시엔 그런 집을 양옥집이라 했다.


대다수 국민들이 그런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경제 개발에 집중하는 당시 정부의 정책으로 빠르게 빈곤율이 감소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농촌과 지방 소도시의 가장들이 있었고,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했던 가장들과 떨어져 살며 생계를 꾸려야 했던 울산 큰 애기들의 고단한 삶과 애환이 짙게 배어 있던 시대였다. 


그들은 그러한 시절 빈곤한 대한민국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인 사명까지는 아니더라도 힘겨운 삶을 살았던 부모님들의 기대를 받으며 이 땅에 태어난 세대였다. 1960년대 태어난 그들은 빈곤했던 한국의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빈곤한 가장들은 절대 빈곤 속에서도 먹을 거 입을 거 줄여가며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처럼 자신들의 못 배운 한을 자식들에게 쏟아부으며 온 정성을 다해 그들 세대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1960년대 한국에서 태어난 세대는 고도 경제 성장기를 직접 경험하며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한 세대다. 아버지 세대의 근검절약과 희생을 바탕으로 자란 그들은 한국 경제 성장의 주력 세대로서 끊임없는 노력과 ‘중단 없는 전진의 기치’ 아래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높은 학력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로 한국 사회의 근간이 되었고,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변화와 발전에 중요한 역군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한 세대다. 


1960년대, 빈곤의 그림자가 드리운 한국 사회에서 서울은 꿈과 희망의 도시였다. 꿈을 품고, 더 나은 삶을 갈망하며 서울로 상경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당시 울산은 아직 오늘날의 거대한 공업 도시로 거듭나기 전, 농업과 어업에 의존하는 빈곤한 지역이었다. 사실, 울산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도시와 농촌은 비슷한 상황이었고, 남편과 헤어져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의 삶은 더욱 힘겨웠다. 선택의 여지없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은 마치 거센 풍랑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일엽편주나 다름없이 지난했다. 


이 노래는 서울로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는 착실하고 성실한 그리고 억척스레 사는 울산 큰 애기의 사연이 담긴 노래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서로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현실이었지만, 울산 큰 애기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가정을 지켜내는 당시 여성상을 잘 표현한 노래다. 


‘울산 큰 애기’란 노래엔 그런, 그들의 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가난과 고난, 그리고 그 속에서도 잃지 않던 희망과 의지의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었다.


이후 '울산 큰 애기'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울산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울산을 떠나 타향에서 살아가는 노래 속 삼돌이와 같은 사람들에겐 향수鄕愁를,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울산의 큰 애기(맏며느리)들에겐 헌신적인 사랑이 담긴 노래로 사랑받았다.


그렇게 만고풍상萬古風霜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던 가난한 시절, 예쁜 여자들이 많았던 서울에서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삼돌이는 이 시대의 가난한 가장들과 형제자매들이었고 ‘울산 큰 애기’는 그들의 노래였다. 


이 노래가 발표될 무렵, 경상남도 울산시는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빠르게 공업단지 조성이 추진되었고, 당시 인구는 약 27만 명이었다. 하지만 울산 원도심이었던 오늘날 중구는 우마차나 다닐 수 있는 비포장도로와 초가집과 적산가옥(敵産家屋,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수탈한 한반도 내 재산 중 패망 후 일반에 불하된 가옥)들이 전부였던 시대였다. 


그렇게 보잘것없던 울산은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점차 공업도시로 성장했으며 1995년 경상남도 울산군과 통합되었다. 인구 100만 명의 거대 산업도시로 발전되며 1997년 울산광역시로 승격되었고 현재는 대한민국 최대의 산업도시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울산 출신의 많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 '울산 큰 애기'는 울산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노래로 자리 잡았다. 2000년에는 울산광역시와 지역 기업체, 유지들의 뜻을 모아 간절곶에 노래비가 건립되었으며, 울산광역시 중구의 마스코트와 울산 현대 치어리더팀의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삼포 개항과 염포


이른 아침 젊음의 거리엔 휑하니 찬 바람만 머물고 있었다. 오늘 그들은 북구 염포산 입구에서 출발해 울산대교와 방어진항, 대왕암 해맞이공원을 거쳐 동구 일산 해변에 이르는 공식거리 12.2km, 4시간 30분 소요 예정인 해파랑길 8코스를 걸을 예정이다. 


선발로 출발하는 친구들을 염포산 입구에 내려주고 원철, 향순과 함께 그는 일산해변에 차를 주차했다. 택시를 이용해 염포산 입구로 돌아온 그들은 10시 45분 그렇게 염포산으로 올라 먼저 출발한 친구들과 합류한 후 해파랑길 여행을 시작했다. 오늘 마주하게 될 해파랑길의 새로운 풍경과 그들의 또 다른 해파랑길 이야기를 기대하며. 


대부분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조선 세종 때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을 기억할 것이다. 이종무는 태종 이방원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즉위하던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른 무장이다. 당시 고려말부터 쓰시마섬을 거점으로 왜구들의 빈번한 해안 침략과 노략질은 갈수록 피해 규모가 커져 국가적인 근심 덩어리였다. 이때 조종은 왜구에 대한 강경책으로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섬(對馬島)을 공격하여 정벌케 하였으며, 동시에 부산포와 염포, 제포(창원 웅천동) 등 3포를 개항하는 유화책도 병행했다. 


과거 조선 세종 때 왜구에 대한 유화책으로 개항되었던 염포는 오늘날 울산 염포동이다. 방어진순환도로와 염포로가 교차되는 로터리에 ‘염포, 3포 개항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방어진 순환도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3~4백 미터, 걸어서 약 5분 거리에 그들이 오늘 걷는 해파랑길 8코스의 시작점 염포산 입구가 있다.  


염포산鹽浦山은 울산광역시 동구와 북구 염포동에 걸쳐 있는 해발 203.4m 높이의 작고 아담한 산이다. 나지막한 산이지만 사계절 태화강 하구와 미포 주변 경관 조망이 매우 뛰어난 산이고, 시내와 가까워 접근성이 용이한 산으로 편백나무 숲길과 벚꽃길이 조성되어 있다. 비교적 잘 정비된 탐방로를 따라 봄가을로 탐방객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염포산은 꽃 피는 봄이 오면 꽃 축제를 즐기는 산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산이다.


첫날 6코스에서 함월산, 신선산, 삼호산을 오르내리며 이미 낮은 산의 매운맛을 제대로 본 터라 염포산으로 오르는 길은 산책로인 듯했다. 그럼에도 높고 낮음 만으로 판가름할 수 없는 산은 여전히 산이었다. 헉헉거리는 숨결과 떨리는 다리, 지칠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땀을 닦아내고 다시 한 걸음 내딛는 일은 크고 작은 산이나 높고 낮은 산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졸가리만 남은 채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철 모르는 관목은 푸른 잎새를 미처 내려놓지 못하고 여전히 여름인양 가을에 머물고 있었다. 


염포산 정상을 비껴 벚꽃이 필 때 오면 좋았을 벚꽃길을 걸을 때였다. 앞에서 쓰적쓰적 떨어져 걷던 부부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 그에게 남자가 ‘어디서 오셨느냐?’라고 물으며 인사를 건넸다. ‘좀 멀리서 왔습니다. 춘천에서….’라고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 걷는데, 군생활을 춘천에서 했다며 부인과 1~2m가량 사이를 두고 걷던 남자가 반색을 했다. 본의 아니게 자연스레 부부 사이에 끼어서 걸으며 이야기가 길어졌다. 남자는 춘천에서 군생활을 했다고 그와 말을 트곤 별 말이 없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부인과 같이 걸으며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걷는 말수가 적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를 붙잡고 얘기하는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의 부인이었다. 그는 또 본의 아니게 꿩 대신 닭이 되어 적당이 호응하며 그저 부인의 얘기를 들어주며 걸었는데, 봇물이 터진 부인의 이야기 허리를 잘라낼 기회를 찾지 못하여 딱 끊어낼 수 없는 참이었고, 저만치 앞서 걷고 있는 친구들과 사이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명실이 "여보, 빨리 와!"라고 큰 소리로 적시의 견제구를 날려 주었다. 견제구였는지 구원의 밧줄을 내려줬는지 암튼 그 덕에 봇물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는 부인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뭔 주제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대화였는데, 과한 개발로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는 관광지 개발에 대한 우려 섞인 얘기를, 입 떨어진 개구리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부인의 이야기를 차마 딱 잘라 끊을 수 없었던 그의 사정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던 명실의 적시타로 가까스로 3루에서 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그였다.


이제 잎이 얼마 남지 않은 앙상한 가을로 이어지는 벚꽃길을 따라 걸었다. 아직 잎을 떨구지 않고 있는 나뭇잎이 가을 햇살에 반짝거리며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던 아름다웠던 봄을 추억하는 듯했다. 붉게 물든 단풍잎이 봄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처럼 흩날리는 벚꽃 길이었다. 길바닥에 뒹구는 낙엽들이 그들의 발걸음에 부서지며 쓸쓸한 가을바람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임도를 따라 화정산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 그들의 뒷모습은 떠나가는 가을에 홀로 남겨진 그림자였다. 


그렇게 오후 12시 10분경 화정산 울산대교 전망대에 당도했다. 높이 63m의 타워형 전망대였다. 화정산이 해발 203m임을 감안하면 266m 높이의 전망대인 셈이었다. 이 전망대는 360도 파노라마 전망으로 울산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1층 입구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3층 내부 전망대로 바로 올라갔다. 사방팔방 유리창이었던 3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은 세계적인 산업도시 울산의 오늘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화정산 기슭에서 흘러내린 미포 해안을 따라 현대미포조선소와 길이 1,150m의 국내 최장 현수교 울산대교蔚山大橋가 눈앞에 펼쳐졌다. 울산항, 울산신항 주변의 석유화학단지, 아산로를 따라 이어지는 현대자동차 단지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쪽빛 하늘 아래 미포는 푸른 에메랄드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크레인들은 조선소의 활기를 더했다. 파도가 끊임없이 일렁이며 은빛 물결이 더없이 아름다운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선박들은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로 가득한 동해로 나가고 있었다. 멀리 산자락 아래 펼쳐진 울산 시내와 그 너머 아득하게 보이는 산그리메까지 쪽빛 가을 하늘로 물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망대에서 태화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야를 따라 손가락을 펴서 어딘가를 가리키며 그렇게 울산을 바라보았다. 어쩜 이렇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일까? 푸른 하늘이 쪽빛을 강물에 풀어놓고 역동적인 울산을 그렇게 쪽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미포를 빠져나간 따스하고 부드러운 눈부신 가을 햇살은 동해의 푸른 바다 위로 반짝이며 넘실거렸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관광기념품 판매점에 들렸다. 의논 끝에 이번 해파랑길 3차 원정에 선뜻 큰 마음을 담아 금일봉으로 협찬해 주었던 승문에게 선물할 기념품을 구매하였다. 이탈리아 여행 때 가는 곳마다 냉장고자석을 샀던 승문을 떠올리며 구매한 선물이었다. 승문은 노모를 모시는 개인 사정으로 이번 원정에 합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렇게 마음으로 표현한 친구였다.  


타워 전망대 앞 주차장에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두고 사진을 한 장 남겼다. 다시 봉수로를 따라나섰다. 조선 전기의 천내봉수대(華亭川內烽燧臺)로 이어지는 길로, 봉수대에 관한 소상한 안내판 설명이 이어지는 길이다. 


조금 전 지나온 염포산에서 동북쪽 해안가에 높이 189.9m의 봉대산이 솟아 있다. 이곳엔 조선 세조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주전(남목) 봉수대(朱田烽燧臺)가 있는데, 봉수대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옛 군사 통신기지다. 싸리나무, 소나무, 산솔갱이(生松, 生松枝) 삼(麻), 땔나무(積柴), 쑥, 풀, 말이나 소의 배설물, 당겨, 가는 모래 등 거화 재료를 사용하여 낮에는 연기를 올렸고, 밤에는 횃불을 올렸다. 비나 바람으로 횃불이나 연기를 올리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북, 징 꽹과리, 나팔 등 청각용 악기와 백기(白旗), 대기(大旗), 상방고초기(上方高招旗), 오색표기(五色表旗), 오방신기(五方神旗) 등 각종 깃발을 사용하여 군사적 목적의 통신을 교신했던 시설이다. 주전봉수대는 대부분 사각형이었던 세종 때의 봉수대와 달리 직경 5m, 높이 6m의 원통형으로 석축을 쌓아 만든 봉수대이다.


길을 걸으며 안내판에 기재된 설명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조선시대 봉수대의 종류와 거화 재료 등 비치 물목, 봉수대의 운영과 봉수노선과 대응봉수 등 조선시대 군사적인 정보를 신속하게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던 통신제도와 체계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봉수로를 따라 이어지는 해파랑길은 화정 천내 봉수대로 오르는 계단길로 이어졌고, 울산과학대학교 동부 캠퍼스를 지나 방어진체육공원 입구로 이어졌다. 방어진 체육공원 산자락을 이용하여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주말 농장을 가꾸는 듯했다. 공사장 비게 파이프를 세우고 그물망을 설치하여 경계를 구분해 놓은 밭뙈기를 피해 요리조리 꼬불꼬불 이어지는 어지러운 골목길을 방불케 한 주말농장 길을 따라 걸었다. 햇살 가득한 가을 오후, 밭뙈기엔 대파, 상추, 배추, 무 등 깊어 가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밭뙈기 한 귀퉁이에 설치한 형형색색의 그늘막과 파라솔, 의자와 간이 테이블 등 잡동사니로 얼기설기 꾸린 도시 근처의 주말농장 풍경을 벗어나 방어진 시내로 이어지는 해파랑길,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그들과 함께 걸었다. 


햇살은 따스했고, 방어진 시내로 들어서는 그들의 마음 또한 따듯했다. 길가의 나무는 가벼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고, 둥그런 곡면 반사경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파란 하늘의 그림자가 되었다. 얼굴에 가득한 그들의 미소는 그렇게 파란 하늘로 너울너울 날아가는 나비가 되었다. 졸가리 사이로 들어오는 방어진 시내의 교회 첨탑 위로 드러난 십자가는 파란 하늘에 박제된 듯했다. 


도롯가 손바닥 만한 자투리 땅에 가지런히 가꾼 채소밭엔 도시 농부의 손바닥 같은 배춧잎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작은 텃밭이지만, 그곳에는 도시 농부의 정성과 노력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까스로 나뭇가지를 피해 들어오는 햇살 아래 싱싱하게 자라는 푸성귀들은 또 다른 가을의 색깔이었다. 



천재동 선생과 또 다른 가을 풍경 방어진항


가로등에 게양된 태극기가 펄럭이는 도로를 따라 방어진으로 들어갔다. 잠시 멈춘 건널목에 일곱 명의 아이 같은 해맑은 얼굴로 서있는 그들의 모습에 따듯함이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향순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고 경희와 원철은 나란히 서서 두 손 모아 스틱을 잡고 있었다. 미연은 그런 모습을 사진에 담는 그를 찍고 있었고 선글라스 너머의 규철과 명실의 눈동자는 문현삼거리로 쏟아지는 파란 하늘을 쫓고 있었다. 


시내 구간을 통과하는 해파랑길은 방어진 순환도로를 따라 문재 사거리를 지나 꽃바위로로 이어졌다. 방어진方魚津에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등대와 파도, 방어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방어진 조형물을 지나 방어진항으로 들어선 시간은 오후 1시 25분경이었다. 


세종 때 대마도 정벌과 병행했던 유화책으로 삼포(三浦)중 하나로 개항된 이곳 방어진, 염포(鹽浦)엔 제한된 수였지만 무역을 위해 왜인(倭人)이 드나들었다. 이후 삼포왜란이 발생한 후 자취를 감췄던 왜인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다시 들어와 이곳을 군사기지로 삼았던 염포, 방어진이다.


조선시대 때 방어진 부근엔 국유 목장이 경영되었고, 천내봉수(川內烽燧)는 남쪽의 가리산(加里山)과 북쪽의 남목천봉수(南木川烽燧)를 이어주는 봉수대였고, 경상좌도병마절제사영(慶尙左道兵馬節制使營)이 있었던 동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방어진항 입구에는 천재동 선생의 작품들이 상시 전시되고 있었다. 특히 물고기를 머리에 이고 가는 모녀를 붉은색 토우로 만든 ‘가자가자 장에가자 개기사로 장에가자’란 제목이 붙어있는 작품은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예전에 서민들이 입던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의 해학적인 얼굴은 마치 방어를 닮은 듯했다. 팔꿈치까지 내려온 팔 소매를 따라 자연스레 시선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광주리에 한가득 담긴 물고기는 퍼덕거리며 광주리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미연과 함께 잠시 선생의 작품을 감상하며 사진을 남겼다.


빙어진에서 태어난 증곡(曾谷) 천재동(千在東, 1915~2007) 선생은 토우, 동요 민속화, 연극, 탈·가면, 민속놀이 분야에서 뛰어난 동래 야류(탈, 가면 제작) 예능 보유자로 무형문화재 제18호이다. 일본 도쿄(東京)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수료한 민속 화가였으며, 1955년까지 25년간 울산에서 평교사로 교편을 잡았던 교육자였고, 아동극단과 극단 ‘마당’을 창단하고 ‘붉은 카네이션’, ‘위협’, ‘대합실’, ‘흥부전’ 등의 작품을 공연하였던 연극배우였다. 또한, 1967년 3월 뤼브케 독일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했을 때 ‘민속 길놀이’를 제작 지휘했던 공연 연출가이며 민속 예술가였던 천재동 선생은 ‘한국의 페스탈로치’라고 불리는 다재다능한 예능보유자였고 예술인이었다. 


물회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방어진항 포항횟집(울산 동구 중진 2길 10)을 찾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운 전채 요리가 한 상 차려졌다. 고구마, 새우, 감자 샐러드, 소라, 레몬청을 곁들인 도라지, 껍질째 삶은 땅콩, 가자미알, 꼬막조림, 번데기, 도토리묵, 묵은지에 부추전까지 다양한 음식들이 식욕을 자극하며 식사를 더욱 기대하게 했다.


소주와 맥주를 시켜 한 순배 잔이 돌고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특히 원철이 소라를 돌려 굵직한 소라 알맹이를 꺼내더니 경희의 입에 먼저 넣어주는 이벤트성 행동과 멘트에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물회가 나오기도 전에 술잔이 몇 순배 도는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맛깔스러운 양념을 얹은 물회가 등장했다. 눈으로만 봐도 맛있을 것 같은 물회였다. 국수까지 말아 물회 한 그릇을 뚝딱 해 치웠다. 함께 나온 매운탕에 밥까지 얹어 맛있고 푸짐한 점심 식사를 마무리했다. 물회 한 그릇만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상다리가 부러질 뻔할 정도로 풍성한 음식이었다. 원철의 재치 있는 연출 덕분에 모두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방어진항 포항횟집에서 즐거운 오찬을 만끽하며 행복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든 그들이었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한 바탕 웃으며 맛있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온 그들은 식당 앞 삼거리 천재동 선생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쉼터에서 잠시 머물렀다. 2021년 울산 동구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조성된 ‘천재동 예술쉼터’였다. 


사각 기동에 달 노래, 산, 게 노래, 거미 노래, 별, 부엉이 노래, 낙지 노래, 잠자리 노래 등 한국 전래동요에 천재동 선생이 그린 민속화를 타일에 새겨 조형물로 세웠고, 둥그런 꽃바구니를 옆에 낀 무명 치마저고리와 차림의 여자 아이와 꽃을 든 남자아이가 어깨동무를 한 모습을 독보적이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담아낸 천재동 선생의 토우 작품이 전시된 소박하지만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공간이었다. 토우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댕기 머리 소년과 소녀가 서로 어깨동무를 한 모습이었다. 깨진 타일로 ‘봄꽃노래’라 제목을 붙인 토우 작품이다. 씰룩 거리는 입과 코가 서로에게 기울어져 있는 모습은 이 작품의 제목이 ‘봄꽃노래’ 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표정이었다. 이러한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 작품으로 담아낸 천재동 선생의 예술적 감성에 경탄을 아니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경희와 명실, 미연, 향순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각자 다른 모습과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따스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그녀들이 앉은 의자는 언젠가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에서 보았던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타일조각으로 모자이크 한 벤치 작품과 유사했다.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가우디의 모자이크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머물렀던 스페인 여행 추억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경희가 앉은 모자이크 의자는 민속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와 ‘이놈 말뚝아!’를 깨진 타일조각으로 모자이크 한 작품이다. ‘이놈 말뚝아!’는 영남 탈춤의 대표작인 ‘야류별곡’ 제2장 ‘양반과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양반과 도령 탈을 쓴 인물들이 “이놈, 말뚝아~!’라고 하인 말뚝이를 불러 놓긴 했는데, 등장한 이놈, 말뚝이는 양반들을 놀려먹으며 양반네들의 패륜적인 행태를 규탄하는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탈춤에 나오는 장면이다. ‘동래야류’에서 비롯된 ‘야류별곡’은 춤과 음악, 유희가 녹아 탈춤으로 태어난 창작 전통공연예술이다.      


아래에 국립부산국악원의 2022 무용단 정기공연 ‘야류별곡’을 링크해 둔다.

https://youtu.be/Ac8t_YEKy-0?si=s2tFOyGW7QQa_t3k


이곳에 새긴 한국 전래동요 중 ‘게 노래’를 소개한다.


게 노래


기 한 마리 죽었네


밤기 한 마리가 죽었네

엄마한테 편지하니

그너무 자식 잘 죽었다.

형님한테 편지하니

아이고 아이고 니 동숭아

어야다가 죽었노

난리판에 죽었다.

어에어에 울었노

응응 울었다.

어디어디 묻었나

죽탑 밑에 묻었다.



잠시 앉아 쉬어 가는 공간이지만 천재동 선생의 독보적이고 해학적인 예술적 감성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우리 전래동화와 방어진을 모티브로 깨진 타일로 모자이크 한 벤치는 아담했지만 바르셀로나의 구엘공원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내친김에 이러한 쉼터를 특화해 몇 개 더 만들어 놓으면 방어진을 추억하는 핫 플레이스로 좋을 것 같았다. 나름 의미가 있어 보였던 ‘천재동 예술쉼터’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오후 일정을 진행했다. 


방어진항을 따라 걸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낸 방어진항의 풍경은 그 자체로 유혹적이었다. 가을볕에 널려 놓은 생선 말리는 진풍경은 바닷가 어촌에서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가을 풍경이었다. 싱싱한 생선들이 가을볕에 빛나며 보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방어진공동어시장으로 향했다. 방어진항의 매력에 흠뻑 취한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을볕에 붉은 속살을 드러낸 다양한 생선들은 충분히 맛있어 보였고, 어물전 구경이 찬거리 장보기가 되다 보니 방어진항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머리와 꼬리가 다듬어지고 가을볕에 적당히 마른 채반에 진열된 생선들이 마치 어여쁜 색시처럼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장보기에 나선 이들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낙점한 39호 경매인 모자를 쓴 아주머니의 어물전에서 흥정이 시작됐다. 일곱 명의 남녀가 어물전 앞에 우르르 몰리다 보니 손바닥 만한 가게는 금세 북새통이 되었다. 매대에 진열된 생선을 가리키며 한 채반에 오만 원의 가격이 매겨졌고, 미연은 부산 사투리를 능숙하게 굴리며 흥정에 돌입했다. 열한 마리가 열둘, 열세 마리가 되었고, “한두 마리 더 얹어 주시면..." 다시 한두 마리가 추가되었다. 미연이 연신 외치는 "콜~콜!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소리에 주인아주머니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여지없는 흥정의 달인 미연의 모습이었다. 


흥정에 흥정을 거듭하고 덤에 덤을 더하는 미연과 경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는 광경이었다. 점심식사 때 마신 술 한 잔에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있던 경희의 얼굴이 흥정에 열을 올리느라 눈가에까지 불콰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원철과 규철은 미연과 향순 곁에서 눈빛을 번득이며 흥정에 흥을 돋우며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어물전 밖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원철이 흥정에 합류한 셈이었다.


작은 체구로 거듭되는 흥정을 막아내느라 진땀 꽤나 흘리지 싶은 39호 수산 아주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명실이 “오 마이 갓 왜 이렇게 많이 주세요?!”라고 민망해하며 덤을 마다하지 않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까르르 웃던 미연과 명실의 웃음소리가 어물전을 벗어나 가을 하늘로 나풀거렸다. 연신 덜덜거리며 힘겹게 돌아가며 바람을 뿜어내던 대형 선풍기도 부산 아지매 미연의 흥정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지 싶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손님으로 매장에 없던 아저씨까지 어디선가 나타나 포장을 도왔다. 차례차례 배송지 주소를 적고 값을 치르고 흥정을 마무리했다. 미연은 포장 박스에 한 마리 생선이라도 더 집어넣느라 39호 아주머니와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며 "되니, 안되니"를 주고받고 있었다. 매대에 얌전히 올라앉았던 생선 채반은 순식간에 동이 났고 39호 모자를 쓴 아주머니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아주머니의 엄지손가락은 카메라를 향해 척하고 올라갔고, 이어서 V자를 그리는 아주머니의 검지와 중지엔 오늘 장사를 잘했다는 승리의 기쁨이 그려져 있었다. 39호 아주머니의 나이는 70이라 했는데, 나이보다 20년은 젊고 곱게 보였다.    


건조대에 널어놓을 생선을 손질하는 아주머니의 능숙한 손놀림은 방어진항 건조대를 차곡차곡 채워 나갔고,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가을 하늘은 활기가 넘치는 방어진항에도 머물고 있었다.


또 다른 가을 풍경이었던 방어진항을 떠나는 그들의 경쾌한 발걸음엔 유난히 따듯했고 행복했던 그날의 추억이 그림자가 되어 따라 걷고 있었다. 


울산 수협 방어진 위판장엔 빈 생선상자만 그득히 쌓여 있었다. 빈 상자들은 오늘 아침까지 활기 넘쳤던 방어진항의 모습을 말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흥겨운 축제가 끝난 후 막이 내려온 무대처럼 쓸쓸함이 묻어났지만, 동시에 다가올 내일 또 다른 축제를 준비하는 설렘이 머물고 있었다.


이렇듯 방어진항은 가을에도 매력적인 곳이다.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가을의 기억을 주워 담고 있는 건조대에 널어진 생선, 오가는 이들의 웃음이 나풀거리는 쪽빛 가을하늘, 생선 손질에 특화된 듯 능숙한 아주머니의 손길, 그리고 위판장의 빈 생선상자. 이 모든 것들은 방어진항에서 펼쳐지는 삶의 이야기다. 그것은 땀과 노력, 그리고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진 이야기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가을 풍경이다. 삶을 더욱 반짝이게 만들어 주는 무지개 빛 기억을 담아내는 방어진항이다.



방어진항 가을 이야기/조영환



붉은 속살을 드러낸 생선, 

건조대에 널려 가을의 기억을 주워 담고 

오가는 이들의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

쪽빛 가을하늘로 나풀거린다.



능숙한 아주머니의 손길, 

꿈과 희망으로 차곡차곡 채워지고

방어진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슬땀

반짝이는 무지개 빛 가을 풍경으로 채워진다.



위판장에 그득 쌓인 빈 생선상자,

막이 내린 무대는 쓸쓸함이 가득하고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떠나는 고깃배엔

또 다른 축제를 준비하는 설렘이 머문다.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활기 넘치는 방어진항에 머물고

유난히 따듯했고 행복했던 그날의 추억은

길을 걷던 가을 풍경의 발걸음을 따라나선다.



그림자가 되어 따라 걷고 있던 그날의 추억은 

반짝거리는 방어진항의 이야기였고

무던히도 살아가는 방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방어진항의 가을풍경으로 담긴다.  



성끝마을 슬도와 대왕암 해맞이 공원


울산해양경찰서 방어진 파출소를 지나면 해파랑길은 성끝마을로 이어진다. 성끝마을은 한때 재개발 논의가 있던 오래된 마을이었지만, 특색 있는 마을로 조성 사업으로 골목길을 따라 울산의 상징 고래가 벽화로 그려지며 ‘성끝벽화마을’로 거듭난 마을이다. 장생포항과 함께 울산의 대표적인 고래 항구 방어진항이다.


방어진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막아주는 방어진 방파제가 슬도까지 ‘슬도바닷길’로 이어진다. 슬도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바위섬으로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칠 때 거문고 소리가 난다 하여 슬도(瑟島)라 부르는 노래하는 섬이다. 슬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 슬도명파(瑟島鳴波)는 방어진의 특별한 풍경 12경 중 하나이다. 


항구에 머물고 있는 고깃배들 뒤로 슬도 등대가 들어왔다. 수면 위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윤슬이 반짝이는 등대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그저 바람에 일렁이는 은빛 물결이 머물고 있는 슬도 바다에 강렬한 오후 햇살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햇볕은 그렇게 붉은 햇무리를 그리며 바닷가 마을 끝 슬도로 내려왔다. 수평선 끝으로 노랗기도 하고 때때로 붉어지기도 한 하늘이 바다와 맞닿으며 그들의 등 뒤로 무리(Halo, 光背)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를 등지고 슬도바닷길에 서있던 그들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마치 출정을 앞둔 일곱 명의 전사처럼. 영화를 찍어도 되겠다 싶었다. 슬도는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 2’가 촬영된 곳이었다. 


은빛 물결, 햇무리에 감싸인 슬도 등대와 고깃배들, 그리고 노랗게 물드는 바다와 하늘, 출정을 앞둔 일곱 명의 전사들까지 오후 3시가 넘어가는 슬도 바다엔 그렇게 모든 것이 머물고 있었고, 함께 머물러 있기는 그들도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경희, 미연, 명실, 향순이 갯가에 작은 돌을 하나씩 쌓았다. 그녀들이 쌓은 돌은 슬도에 머물고 싶은 그녀들의 마음이었다. 미역을 한 다발 건져낸 경희가 미역줄기를 치켜들며 웃었다. 얕은 파도가 밀려오는 갯가에 머물며 쪽빛 하늘과 바다와 그렇게 하나가 된 그녀들이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잠시 머물다 간 갯가엔 몽돌만큼이나 많은 쪽빛 추억과 푸른빛 이야기가 머물고 있었고, 슬도 앞바다엔 울산신항으로 입항 대기하는 화물선들이 줄지어 머물고 있었다.


성끝마을 끝자락, 바다가 시작되는 언덕에 자리 잡은 카페 '슬도 매력에 빠지다' 옆으로 길을 낸 대왕암둘레길로 이어지는 해파랑길로 파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걸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간 후 아기가 혼자 남아 있을 것 같은, 고기 잡는 어부와 철 모르는 딸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바다가 시작되는 언덕 끝자락에 겨우 기대어 지은 나지막한 오두막집 한 채를 카페로 개조한 집이었다.  


슬도 등대가 멀어졌다. 강렬하면서도 황홀했던 슬도 바다의 오후 풍경을 뒤로하고 성끝마을 슬도를 떠났다. 푸른빛으로 넘실대는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은 수평선 끝에서 엷어지며 점이(漸移)되어 이내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대왕암 둘레길은 바다와 바투 붙어 있는 길이다. 원철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향순이 뒤를 따랐고 미연도 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오늘 걸을 거리가 총 12km 정도여서 부담이 적은 편이기도 했지만,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되는 풍경이 너무 좋은 곳이었기에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추억을 남기며 걸었다. 경희는 무릎을 굽히고 허리도 살짝 접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손가락을 펴 보이는 귀염 뽀작 포즈까지 취했다. 가끔 짝을 이루어 마주 보며 사진을 찍었고, 또 가끔은 포옹까지 연출하며 찍었다. 그들은 그렇게 찍는 사진을 ‘애정행각’이라 표현했다. 그리 노닥거리며 애정행각까지 벌이며 걷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거리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염포산에서 견제구를 날렸던 명실이 또 한 마디 했다. “이제 애정행각 좀 고만하고 제발 진도 좀 나가자~아아~”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말에 모두가 함박웃음이 터졌다. 


그랬다. 방어진항에서 점심을 먹고 어시장까지 들렸다. 슬도에선 강렬했던 햇무리에 이끌려 머물렀고, 대왕암 둘레길에선 진하디 진한 푸른 바다와 쪽빛 하늘이 하나로 점이漸移되고 점증漸增되는 풍경에 빠져들었다. 하늘이 이래도 되나…? 바다가 이렇게 진하게 파래도 되나…? 싶었다. 바닷가 송림은 여전히 푸른 숲을 이루고 있었지만, 길가에 난 풀들은 푸르렀던 지난여름을 취소하며 붉은색 가을로 이미 접어들고 있었고, 붉은 황토 빛깔로 이어지는 대왕암 둘레길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하얀 거품을 갈기처럼 세운 파도가 남실거리며 밀려왔다 흩어졌다. 


그렇게 견제구를 다시 날린 명실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는지 대왕암으로 이어지는 바닷가 벤치에 앉았다. 진하디 진한 푸른 바다가 그녀에게 점이 되는 듯했다. 명실을 따라 규철, 미연도 나란히 앉았다. 빨간색 벤치에 앉은 그들의 입가엔 이미 모래부리 같은 웃음이 입꼬리에 걸렸고 발치에서 서성이던 진한 바다내음이 팔딱거리며 남실거렸다. 


그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바다는 따듯했다. 아직 지난여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남아있는 온기만큼 아쉬움도 남아 있었고, 마음으로 전해지는 아쉬움은 딱 고만한 그리움이었다. 


여행은 그에게 익숙했지만 낯선 것이기도 했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풍경과 새로움은 무딜 대로 무뎌진 감성을 자극하는 대장간 같은 것이었다.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은 풀무질을 하며 마음의 화덕에 불을 지폈고, 강렬했던 햇무리는 그의 감성을 뜨겁게 달군 쇠붙이처럼 두드렸고, 갈기를 세우고 밀려오는 파도는 시원한 냉각수처럼 그 뜨거움을 식혀주었다. 그렇게 연속적이며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여행은 그의 무뎌진 감성을 예리한 날이 선 검으로 별러 주는 대장간이었다. 


그렇게 대장간에 맡겨진 자갈밭 같았던 마음의 밭뙈기를 비로소 갈아엎을 수 있었다. 손바닥은 갈라지고 터져 곰 발바닥처럼 될지 언정 갈아엎은 마음의 밭뙈기에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갈밭 같은 밭뙈기엔 곰 발바닥 같이 변한 농부의 손바닥이 숨겨져 있는 법. 이니까!


대왕암 해맞이 공원을 1.3km 앞두고 속도를 내려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원철과 향순이 이미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고, 경희와 명실, 규철이 뒤를 따랐다. 그와 미연은 빠져들 것 같은 바다풍경을 핑계 삼아 예의 ‘애정행각’을 이어갔고, 오토 캠핑장을 지나 대왕암이 보이는 솔바위산 자락의 소나무 숲에 이르렀을 땐 이미 오후 4시가 임박해오고 있었다. 


잠시 소나무 숲에서 규철이 양말을 벗고 발바닥을 식혀주고 있었다. 첫날 6코스에서 짧은 시간에 낮은 산이지만 세 개의 산을 오르내리며 강행군을 했고, 어제 태화강 대숲길을 따라 15.8㎞를 걸은 터라 이미 사흘째인 오늘까지 40㎞ 이상의 거리를 걸은 셈이었다. 2차 원정인 41~42코스를 걷고 이번 3차 원정에 참여하였던 규철에겐 다소 무리일 수 있었다. 


송림을 벗어나자 해파랑길은 울산광역시교육연수원 앞 해변 자갈밭으로 이어진다. 비교적 큰 자갈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해변은 균형을 잡고 걷기에 다소 어려움이 따르는 길이었지만, 나름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파랑길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 끝자락에서 이어진 기암괴석이 일렬로 도열하여 동해로 내려갔다. 퐁당퐁당 갯가로 뛰어드는 아이들 같았다. 기울어진 햇살이 작렬하며 기암괴석 사면에 부딪쳐 이글거리는 노란 빛깔을 강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경계를 이루는 대왕암으로 황금빛 태양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모래사장이 없는 몽돌 해변으로 밀려온 파도는 제법 굵은 소리를 냈고, 마치 고래들의 울음소리처럼 파도에 쓸리는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대왕암 공원을 바라보며 북진하다 보면 볼 수 있는 너븐개 해안 풍경이다. 한 때 고래를 이곳에 몰아넣고 포획했던 해안으로 과개안이라고도 한다.   


백두산 2,744m에서 시작된 대간을 따라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거친 대간은 태백까지 내려와 지리산까지 이어진다. 태백산을 기점으로 대간에서 낙동정맥으로 시원하게 동해로 뻗어 남쪽으로 내려와 그 끝머리를 대왕암에 두고 바다로 꼬리를 감춘 곳이다. 이곳은 울산의 끝 “울기(蔚埼)”라 하였고, 낙동정맥으로 갈라진 대간의 끝이기도 했다. 이곳에 있던 울기등대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이곳에 주둔하며 기지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조성한 송림으로 인해 등대의 역할이 제한되었고, 1987년 촛대모양의 새로운 등탑을 현재의 장소에 세워 신∙구 등대가 지척의 거리에서 사이좋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색적인 등대가 되었다. 


대왕암이 내려다 보이는 불그스레한 바위로 명실, 경희, 미연, 향순이 올랐다. 원철과 규철은 쉼터에 머물고 있었다. 햇살을 받은 바위들이 울긋불긋 꽃잎처럼 피어난 기암괴석이 흩어져 있었다. 한창 개화 중인 꽃밭을 보는 듯했다. 형형색색 옷차림으로 대왕암을 오가는 사람들이 꽃잎처럼 느껴졌다. 그녀들이 올라선 바위로 붉은 빛깔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붉게 물든 바위는 만개한 꽃잎이었고 그녀들은 활짝 핀 꽃의 암술이 되어 햇살이 풀어놓은 붉은 꽃가루를 받고 있었다. 슬며시 그녀들 사이로 들어간 그는 수술이 되어 향기로운 꽃 한 송이를 완성했다. 꽃밭에 앉아 고운 빛으로 피어나는 꽃을 보는 그녀들 역시 꽃이 되어 푸른 동해 바다 위로 피어나고 있었다. 


바위가 꽃이 되는 풍경, 왠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언젠가 주흘산에서 내려올 때 보았던 ‘꽃밭서덜’이 생각났다. 비 예보가 들어있던 여름 어느 날, 문경에서 하루 유숙하고 주흘산으로 오르려는 날 새벽부터 쿵쾅거리고 비기 쏟아지던 날이었다. 소강상태를 보이던 비는 다시 주룩주룩 혼산(단독산행)에 나선 나그네 마음을 휘적휘적 적시며 내리고 있었다. 추이를 보느라 머뭇거리던 새벽녘을 그렇게 보내고 문경새재 제1관문으로 주흘산에 올랐다 하산하는 길에 보았던, 돌무더기가 쌓여 꽃밭이 된 ‘꽃밭서덜’은 그날 산행의 백미였던 기억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희망은 언제나 고통의 언덕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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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수평선 위로 안개처럼 머물고 있는 불그스레한 노란 고운 빛깔은 어디에서 왔을까? 해는 지면서조차 고운 빛을 풀어 바다로 내려 보내고 바다는 그렇게 해가 풀어놓은 고운 빛깔을 품어 안고 있었다.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품고 있는 고운 빛은 쪽빛보다 더 고운 빛이었다. 쪽빛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들 역시 하늘이 풀어놓은 고운 빛으로 물들며 환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렇게 대왕암 공원에 머물렀던 짧은 시간은 붉게 물드는 기암괴석이 꽃이 되는 순간이었고, 그녀들 또한 꽃이 되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소나무 숲으로 난 길을 따라 일산해변으로 길을 잡았다. 휴무일이었던 대왕암 출렁다리를 지나 해안가로 이어지는 소나무 향이 짙게 배어 있는, 언제고 다시 걷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었다. 바다로 돌출된 바위 사이로 하늘빛 같은 바닷물이 들어와 머물며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해안길을 따라 걸었다. 숲에서 바라보는 일산해변의 풍경은 일반적인 어촌마을 해변과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 크레인이 눈에 들어왔고 고층 아파트가 솟아 있었다. 울산 동구 화정동, 전하 1,2동과 남목 2동을 배후로 현대건설기계 울산공장과 울산미포 국가산업단지가 자리 잡고 있는 해안 풍경은 그야말로 활기차고 역동적인 울산답고 울산스러운 해안도시였다. 


송림을 빠져나오는 계단길을 내려와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달처럼 둥근 해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접시에 담긴 물처럼 찰랑거려 수심이 매우 얕아 보이는 해변이었다. 넓은 모래사장을 따라 둥그렇게 이어진 해안을 따라 들어선 도시와 해변의 모습은 다소 이색적이었고, 보기에 따라 이국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 싶은 풍경이었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종일 찰랑거리는 물을 품고 사람을 품었던 해변엔 붉은 석양이 내려앉았다. 쪽빛 하늘과 눈 부신 푸른 바다, 방어진항의 또 다른 가을 풍경과 거문고 소리를 들려주던 슬도와 함께 노래했던 그들에게 포근한 휴식처럼 느껴지는 바다였다. 이미 붉은빛으로 물든 해변엔 사람들이 머물며 일산해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일산해변에 선 그들은 붉은 노을을 뒤로하고 모래사장을 걸어 나왔다. 수평선에 머물고 있던 안개 같은 금빛 햇무리는 이미 붉은 석양으로 물들고 있었고, 구름 한 점 없었던 하늘도 서서히 붉은빛을 바다로 내려놓고 있었다. 


등대에 불빛이 들어오고 출렁다리에도 반딧불이 같은 불빛이 반짝거렸다. 한때 일산바다를 종횡무진했을 폐 목선은 뻘겋게 녹이 슬고 틈이 벌어진 채 일산항 갯가 풀섶에 폐선이 되어 버려진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방파제 안에 머물던 고깃배들이 하나 둘 일산 바다로 빠져나가고 해안가 도시에도 밤을 밝힐 불빛이 깜박깜박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모래사장 끝자락에 쪼그리고 앉은 노부부의 뒷모습이 담긴 일산해변의 노을 풍경으로 그들의 꽃 같은 미소가 일곱 송이의 고운 빛 꽃으로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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