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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만 Oct 08. 2024

빠삐용의 자유와 맨발의 자유

근본적으로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감옥 하면,

어디가 떠오르는가.


탈옥 영화의 바이블로 불리는 "쇼생크"?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온다는 빠삐용이 갇힌 악마의 섬,

"기아나"?


챗GPT에 물으니,

러시아 레바르다와

미국의 앨카트라즈라 한다.

잔혹한 처우와 극도의 고립, 열악한 환경이란 토를 달면서.


내가 생각하는 감옥은 우리 가까이 있다.

나와 당신, 눈 아래 있는 "신발"이다.

지독하기론 이만한 게 없다.


웬 신발이 얼토당토않은 감옥이란 말인가?

더구나 지독하단 표현까지?

뜬금없고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리는가?


맨발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발은 숨 쉴 틈조차 없는 좁다랗고 꽉 낀  공간에서 보낸다.

우리 몸 전체 2%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98%의 육중한 몸을 지탱한 채.

그곳에서 부르트고 붓고

꼼지락거리며 발버둥 치는 발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발의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신발 에 쑤셔 넣다시피 한 채 종일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

여름철엔 땀내 섞인 퀴퀴한 냄새와,

엄동설한엔 신발 하나로 견뎌야 하는 현실이.

손이야 추우면 주머니에 넣거나 곁불 쬐기라도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차별이.


더구나 정작 발은 갇힌 걸 갇힌 줄 모르고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른 채 평생 신발 속에 갇혀 지냈기에,

가장 가혹한 감옥 아닐는지.




감옥 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빠삐용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영화 전편에 흐르는 핵심 서사지만,

반대로 "미리 체념"하는 두 장면이 인상적이다.


첫대목은,

살인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빠삐용이 감옥으로 가는 모습에서다.

죄수들 무리에 끼어 터벅터벅 감옥으로 향하는 화면이 잡힌다.


여자 친구가 빠삐용을 처연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빠삐용, 당신은 돌아올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그의 옆 동료가 답을 대신한다.

-아니 못 돌아와.




두 번째 대목은,

탈옥에 실패해 한 줌의 빛도 없는 독방에서 벌레를 먹어가며 사투를 벌인다.

심신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상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공포에 부들부들 떨며 꿈을 꾸는데, 재판관이 묻는다.

-네 죄를 알겠느냐?


당연히 살인 누명에 억울한 빠삐용은

-전 결백합니다.

증거도 없이 살인 누명을 뒤집어씌운 거라 항변한다.

되레 무슨 잘못을 한 거냐고 묻는다.


재판관이 말하길,

-"너 진짜 죄는 그 살인과 관계없다."

나는 네가

"인생을 낭비한 죄로 기소하겠다."

"그 벌은 사형이다."


빠삐용은 순간 생각에 잠긴 후 혼잣말로,

-유죄! 유죄! 유죄를 세 번 읊조리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선 잠자리에서 깬다.




누명을 뒤집어쓴 채 감옥에 갇힌 자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체가 인생을 낭비한 죄이고, 인간으로서 가장 중죄란 역설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국가 권력에 의한 개인의 억울한 시대상을 논하거나,

영화 대사와 같은 인생을 낭비한 죄를 거창하게 각성하자는 게 아니다.


억울하게 짓눌려 있는 발을 신발이라는 공간에서 해방하고자 함이다.

단지 발상의 전환만 거치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게 맨발 차림 아니던가.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라 하지 않았나.

맨발에 관심 두는 나에겐 "머리에서 발까지" 2미터도 안 되는 거리다.

신발을 벗기까진 반평생 걸렸기 때문이리라.


머리에서 즉각 받아들이고,

습관만 들이면 되기에 더더욱 그렇다.

맨발로 걷는 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습관의 영역이다.

오로지 신발 벗지 않은 습성으로 나중 더 큰 질병이 따르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상식적인 판단이면 족하다.

즉 남들 좋다 하니 100일만 진정성을 갖고 해보라는 것이다.

매일 100일 동안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없다면,

그만두면 될 일 아닌가.

이것조차 귀찮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다시 영화 이야기다.

빠삐용은 꽃다운 젊은 나이에 교도소에 들어와

백발의 초췌한 몰골이 될 때까지

어느 한순간도

"자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고,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탈출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교도소 규율상 첫 탈옥은 2년 독방,

두 번째는 5년 독방,

세 번째는 가차 없는 사형이다.

빠삐용은 두 번의 탈옥에 따른 7년의 독방 신세를 거쳐,

세 번째 탈옥을 위해 친구인 "드가"와 함께 백척간두의 절벽 위에 섰다.


절벽엔 단둘만 존재한다.

사람도 둘, 장면도 둘, 설정도 둘, 선택도 둘.


"오직 둘 뿐"이다.


 의 강렬한 대비가 선명하다 못해 눈부시다.

긴장감에 가슴이 다.


탈옥하려는 자, 남으려는 자.


빠삐용의 흰머리, 드가의 검은 머리.


감행하면 죽음을 불사한 자유, 돌아서면 감옥에서 돼지를 키우는 삶.


하나의 야자 매트는 자유를 향해 던지고, 다른 하나남겨지고.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 높고 파란 하늘.


세찬 파도 밑엔 식인 상어 떼, 뭉게구름  푸른 야자수.


빠삐용은 전자인 자유를 택하,

드가는 후자인 안정택한다.


망망대해에서 외친 그 유명한 한마디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자식들아!

난 이렇게 살아있다."




당신을 위해 헌신한 발은 이제 신발에서 탈출할 권리가 있다.

평생 억눌린 발은 무슨 죄란 말인가.

창살 없는 감옥에서

신발 벗는 자유는 최소한의 권리다.


맨발이 대세라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쉽게 나서지 못한다.

어씽족을 2백만 명으로 추산하면 4%에 그친다.

96%가 신발에 갇힌 삶을 산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당연시하던 걸 바꾸자니 복잡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걸 필요치 않는다.

맨발이면 족하다.


신발의 효용성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발에는 신발이란 당연한 등식을 깨자는 것이다.

신발의 가치는 인정하더라도,

신발과 맨발의 역할을 확실히 분담하자는 의미다.

밖에 있는 모든 시간을 감당해야만 했던 신발의 굴곡진 역사를, 

이젠 청산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옥죄어 지낸 발에,

이젠 무한 자유를 주어라.

발에 자유란 별것 없다.

신발을 벗어젖히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과 함께하면 된다.


이제부터 발은 제2의 심장이라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취급하는 대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한다.

발이 내는 신음에 귀를 기울이고,

발에 인격권을 선물하자.




그러기 위해선 "실천 탈출 용기"가 필요하다.


"실천"?

생각만 바꾸면 습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사회적 분위기도 만들어졌기에 실천하기엔 더없이 좋다.


"탈출"?

묵직한 단어지만 마음만 먹으면 손바닥 뒤집듯 쉽다.

신발이란 기아나 감옥에서 탈출할 기회다.


"용기"?

어렵게 보이지만 맨발 걷기만큼 쉬운 게 어디 있겠는가.

발을 위해, 자유를 갈망했던 빠삐용의 용기가 필요하다.


실천! 탈출! 용기!

마음먹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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