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육 년 만에 갚은 빚

부처님께 빚을 갚다

by 인해 한광일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얼굴만은 평온해 보였다. 묵은 숙제를 해낸 기분일 터이다. 아니 오래된 빚을 청산한 기분일 터이다. 그러니 틀림없이 숙면일 것이다.


금강경을 사경(寫經)하기 시작한 후로 아내는 절 구경에 취미를 붙였다. 이태 전인가 보문 사엘 한 번 다녀와야 할 텐데 어쩌고 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곤 했었다. 멀지도 않고 교통편이 불편한 것도 아니니 다녀오면 되지 뭘 그리 망설이느냐 했지만, 그러면서도 아내는 쉽게 발을 내딛지 못해 별일이지 싶었다. 속내가 따로 있지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머니의 동치미는 시원하고 잡맛이 없는 데다가 톡 쏘는 탄산이 일품이다. 내가 어머니의 동치미를 유난스레 좋아하는 걸 아는 아내가 어머니께 동치미 담그는 방법을 물은 적이 있다. 들어보니 방법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몇 가지 맛 내기 채소와 함께 동치미용 무를 깨끗이 씻어 적당한 염도의 소금물에 잠기도록 묵직한 돌로 눌러 놓고 한동안 잘 묵혀두는 것뿐이다. 하지만 얼마나 묵혀두어야 하느냐가 관건이다. 한없이 묵혀두면 동치미 맛을 망치게 된단다. 묵힐 만큼 묵혔다 싶으면 봉인을 해제하고 숙성된 무를 국물과 함께 떠서 나박나박 썰어 담아내면 된다지만 아내의 성공률은 별로 높지 않은 편이다.


보문사 주차장에 아내를 내려 준 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으나, 아내는 그때까지도 절 입구에서 쭈뼛거리고만 있었다. 나와 함께 대웅전을 향하는 걸음도 온전치 못해 잠깐 내 팔에 의지하곤 했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혼자 대웅전에 남아 백팔 배를 올리고 싶으니 밖에서 기다리란다. 한참 후에야 대웅전 문이 열리고 아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대웅전을 나서는 아내가 댓돌에 발을 내딛을 때, 또 한 번 휘청거렸지만 별일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내는 머리가 흐트러지고, 얼굴이 붉고, 가쁘게 숨을 쉬었으며, 얼굴과 등줄기와 겨드랑이가 온통 땀에 젖은 모습이었지만 표정만은 어둡지 않았다.


"사십육 년만이야. 진작 올 걸 그랬어."

"......."

"부처님 돈을 훔쳤어, 나이 여섯 쯤에."

지난 수요일 아내는 내게 운전을 부탁하며 드디어 혼자서 삭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으니까 아마도 여섯 살 쯤이었을 거란다. 그때가 무슨 날이었는지, 자기보다 열 살이나 많은 큰 언니의 놀러 가자는 손에 이끌려 간 보문사에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댔다. 어린 눈에 절집 내부에 그려진 처음 보는 이상한 그림들이 그땐 무섭기만 했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처님 앞에 엎드려 연신 절을 하고 나가고, 다른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곤 했단다. 그때 대웅전(오늘 확인한 바로는 '선불전'이었다) 마룻바닥에 사람들의 오가는 발길 아래, 지폐가 한 장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단다. 한참을 보아도 아무도 줍지 않더란다. 어린 마음에 자기 눈에만 떨어진 돈이 보이나 보다 여겼고, 대웅전으로 기어 들어가 그 돈을 주웠단다. 돈을 주워 나오는데도 그 많은 사람 중 아무도 자기에게 뭐라 하지 않았단다. 어린 마음에 돈이 생겨 기쁘기만 했단다.


절을 나온 뒤 혼자서 이곳저곳 가게를 바꿔가며 이것저것 군것질을 했단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 돈이 부처님께 시주하려던 돈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뒤부터 어린 마음에 몹시도 불안했단다. 이후로도 절집만 보면 죄의식이 또렷해지는 통에 괴로웠단다. 그즈음 아무도 몰래 보문사를 다시 찾아가 삼배를 올리고 얼른 절을 빠져나오기도 해 보았단다. 그러나 그렇게 도둑처럼 스며들었다가 도둑처럼 도망치듯 다녀온 절은 조금도 불안과 죄의식을 덜어주지 못하더란다. 마음만 더 불편해져 오히려 보문사에서 되도록 먼 길 쪽으로 다니려고 애쓰게 되더란다. 동료들과의 등산길에 어쩌다 절이라도 만나게 되면 보문사에 빚진 마음을 그곳에서나마 조금 씻어 볼 요량으로 부처님 전에 몇 푼 시주도 해보았단다. 그러나 보문사의 일은 영영 지워지지 않아 지금까지 남모르게 속병으로 앓아 왔다는 것이다. 나는 물을 생각도 없었지만, 아내는 순전히 자기 힘으로 마련한 돈이니 시주금이 얼마였는지 묻지 말라며, 손수건으로 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서울 시내를 관통해야 해서 조금 막혔지만, 햇살은 아직 여유가 있어서 운전에도 여유가 있었다. 신호대기 중에 바라보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도 여유로워 보였다. 무엇이 신나는지 통통통 뛰어 길을 건너는 사람의 발걸음이 명랑하니 보기 좋았다. 흘끗 뵈는 아내의 표정도 편안해 보였다.

며칠 전에 담근 동치미가 제대로 되었을지 궁금하다며 아내가 긴장도를 높였다. 조심스레 동치미 담은 그릇의 봉인을 해제했다. 대개 발효음식의 대부분이 그렇듯 그 쾨쾨한 냄새가 났지만, 기대가 없진 않았다. 조금 이른 저녁상이 차려졌으며, 나는 동치미부터 한 숟가락 떴다. 동치미 국물은 슴슴할 뿐 톡 쏘는 탄산은 없고, 동치미 무도 맛이 덜 들어 씹는 맛도 틉틉하였다. 아내의 표정도 아리송했다. 이번에도 아내는 동치미를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아내는 별 상관없다는 눈치로 밥숟가락을 맛나게 떴다.


아내는 보문사의 일을 묵혀도 너무 오래 묵혀둔 빚이었다며, 그래서 부끄럽다면서도 낯빛은 환했다. 그러더니 여느 날보다 먼저 피곤하다며 잠자리에 들었고, 묵은 잠을 자느라 그런지 코 고는 소리가 제법이었다.





철쭉꽃


개나리보다

진달래보다

조금 늦게 와서도

바람 조금만 불어도

샐쭉샐쭉 웃어주니

난 좋아


목련처럼

장미처럼

사랑 꽃 아니어도

지나가는 차들에게도

흘러가는 구름에게도

샐쭉샐쭉 웃어주니

참 좋아


샐쭉샐쭉 웃어주니

참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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