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원색적인 순간을 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옷장을 열어두고 자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옷장 문이 열리지 않았으면 종종 잠이 잘 안 올 때도 많았다.
마치 내가 잠든 사이 내 상상 속 친구들이 내가 사는 세상으로 놀러 올지도 모른다는 귀여운 믿음 때문이었다.
어두운 방안에 혼자 있으면 괴이하면서도 특이한 상상을 많이 한다.
인형의 집에서 나 모르게 누군가가 숨어 살고 있고,
창문에서 다른 보이지 않은 무언가 들도 날 바라보고 있을 테고, 밤 사이 액자 속 인물이 움직일 것만 같은 엉뚱한 생각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나 보다.
내가 사는 세계 외에도 다른 평행세계의 또 하나의 내가 존재한다고 믿고 지냈다.
나는 다른 나를 "세하"라고 명칭 하기도 했다.
너무 울적한 날이면 세하에게 쓰는 편지도 집안 어딘가에 많았고, 세하를 만나고 싶은 상상도 많았다.
세하는 별다른 충고는 없지만 누구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 오랫동안 그려오기 시작한 그림일기는 세상과 연결 짓는 소통이자 해소가 되었다.
따라서 그림에 재능이 있음이 쉽게 드러났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 예중 입시를 시작한 경험이 있다.
시간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던 내게 시계 형태를 외워서 그려야 하는 입시 체계는 첫 고난이었다.
몇 달 다니다가 가지고 있던 연필과 붓도 버릴 만큼 미술에 흥미를 잃은 채 일반 중학교에 진학했다.
당시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입시가 너무 두려웠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손꼽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목표를 위해 어느 정도 순응하고 타협했다.
가장 좋아했던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최근 성인이 되어서 읽었을 때, 어쩌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렸다.
앨리스가 맞이하는 이상한 사람들과 동물들 모든 상황은 자기 자신과의 갈등에서 나타난 자신만의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앨리스(나)는 아직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재촉하는 토끼처럼 자꾸만 등을 떠미는 사회 혹은 타인에 의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서서 성장하는 자기 자신과 마주한 채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있었다.
완전한 자립을 하지 않은 나와 같았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 하트 여왕 등등은 사회적 규범을 상징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앨리스의 모습이 꼭 내 모습처럼 비쳤다.
굳이 세상을 개척하고 영향력 있게 살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잘 살기 위해서는 평범해야 했다. 성가신 행동은 자칫 잘못된 주의와 주목을 받게 되었던 나는 늘 조심하고 웃어야 했다.
앨리스가 마주한 세상처럼 나의 삶이 거짓이라고 느낀 순간과 혼란은 많았다.
그러나 평범해지기는 싫었다.
나의 드로잉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변형된 형태를 가진 인물, 즉 어른과 아이 혹은 여자와 남자가 불분명한 알 수 없는 주인공이 늘 등장했다.
이 주인공은 모호한 배경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찾고 특정한 행위를 통해 은유적으로 알린다.
최근 내가 그린 주인공이 살고 있는 환경에는 어김없이 버섯이 솟고 다양한 선인장의 세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학교 입학해서 드로잉 하는 시간에 교수님이 내게 주어진 첫 과제는 "입시에서 벗어나기"라는 주제였다. 이는 모순이었고 많이 이상했다.
내가 나의 습관을 바꿔야 하는 과정을 겪게 되면서 많은 혼란을 느꼈다. 변화에 대해 정답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그 도달점이 무슨 기준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우리에겐 모두 무의식이 있다.
경험한 무언가를 기억하고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습관 말이다. 혹은 본연의 솔직한 의지일 수도 있다.
그렇게 자리 잡힌 습관과 공상은 하나의 나를 만들어간다. 교수님이 던져주신 주제에 나를 변화할 작은 방법에 의식과 감정을 이분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행복하다가 아닌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주어에서 나를 빼보았다. 이렇게 구분하게 되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의식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이 비로소 새로운 습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제 3자의 시선에서 나라는 드라마를 바라보는 것도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작은 것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나를 발견했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더이상 무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