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원색적인 순간을 담다
우린 혼란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
거리두기 마저도 어찌나 변덕적인지 제 기분 또한 위아래로 날뛰어 겉잡을 수 없던 순간이 참 무수히 많았다.
그래도 나에 대해 알고 글과 그림을 쓰는 과정을 통해 나를 다스릴 줄도 알게 됐다.
재미있는 뉴스의 기사를 떠올랐다.
파랑새 증후군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 발맞추지 못하고 현재의 일에는 흥미를 못 느끼면서 미래의 막연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병적인 증상을 일컫는다.
직장인이 겪고 있는 파랑새 증후군은
한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직을 꿈꾸는 이 증상으로 자신이 생각했던 업무와 실제 맡은 업무 사이에 괴리감이 생길 때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주로 입사 초기에 이직을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어느 취업포털사이트가 직장인 952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는 무려 60.7퍼센트가 파랑새 증후군을 겪고 있다고 답한 바 있다.(참고 : YTN 뉴스)
파랑새 증후군의 주요 증상은 다음과 같다고 했다.
1. 현실만 생각하면 의욕이 없어지고 피로가 몰려온다.
2.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가 많다.
3. 이상을 꿈꾸고 설렌다.
4. 이상에 대한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있다.
5. 미래에 대해 장담하고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파랑새 증후군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랑새 증후군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과잉보호를 받고 자라난 아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부모에게 의존도가 높은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성장이 더디기 때문에 사회에 나와서 현실과 이상에 부딪히게 된다.
어쩌면 나도 그랬다.
나는 나의 새장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니까.
무언가를 찾아 혹은 향해 쫓는 삶을 경험했다.
사회적인 체계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태어남과 동시에 우린 경쟁했다.
타인보다 더 월등하고 더 잘할 줄 아는 무언가는 곧 나를 판단하는 가치가 되기도 하고 매력이 되었던 경험은 무수했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모양새가 "입시" 라는 예시가 떠올랐다.
평소 나는 나에 대해 안주하고 살기엔 나는 욕심이 많은 걸까 고민했다. 갈망했다는 단어가 맞을지 모른다. 이뤄진 목표는 생각보다 시시하고 허망했으며 그 허탈함 이후가 늘 고민이었다.
막연한 행복일까 어쩌면 행복이란 막연한 것일까
나는 서울 예술의 전당에 위치한 <앙리 마티스> 전시회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
평소 존경하던 작가였던 만큼 기대했고, 또 그만큼 많이 배운 전시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가의 글이 기억에 남아 함께 끄적여 본다.
나는 내 노력을 숨기려고 노력했고
사람들이 내가 작품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결코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내 작품이 봄날의 가벼운 기쁨을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많이 어렵고도 심오했다.
전시회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고뇌와 가치를 알까, 그림을 단순하게 그리기까지 얼마나 고민하는 건지 알까 저마다 나도 그리겠다 우스워하는 모습도 봤다.
그랬기에 그런 변화와 기법을 난 알아주길 바랬던 경우가 더 컸는데 충격적이었다.
드러나는 것이 마냥 정답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는 예술가가 탐험가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 발전과 자신의 절차에 대한 관찰로 시작해야 한다 했으며 그 후 그는 어떠한 제약도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만든 나에 대한 제약이 곧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는 나를 옥죄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벗어나고
더 큰 행복만 꿈꾸는 욕심 많은 파랑새는
사실 나일지도 모른다.
이런 모순은 일상을 살면서 조금의 불편함을 가져오는 것 같다. 위처럼 경험을 통해 너무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유사한 지각들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지각 현상이 아무리 유사하다 할지라도, 그 지각에는 단속이 있다는 것을 혼란스러워한다.
이런 지각의 동일성과 지각의 단속은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대립은 결국 우리의 불안을 가져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며, 결국 이런 대립을 해소하고자 했다.
세상에 있지 않은 사파이어 같은 파랑새를 좇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의 원리를 다른 원리에 종속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불안이 상반되는 두 원리의 대립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행복의 기준
순조로운 이행은 유사한 지각들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유사한 지각들을 동일하다고 말한다.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 와 기쁨 이는 공존해야 하며 어쩌면 같을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말이다.
글을 적고 있는 이 순간도 나에게 행복이지만
소소함으로써 더더욱 나를 상기시키고 추억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너무 더운 날, 친구가 사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정말 시원했고 소중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야식메뉴를 함께 먹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보낸 밤이 소중했다.
가족들이 끼니 제때 챙기지 못할까 틈틈이 보내주신 과일, 반찬들을 받을 수 있음에 소중했다.
이처럼 상황에 따른 감정과 느낌은 오로지 나의 몫이자 기준도 내 몫일지도 모른다.
나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결국 나지만,
나를 갉아먹는 사람도 결국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