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될까?
2학기 시작
어느덧 대학생활의 첫 방학이 끝나고 1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름 한 학기를 같이 동거동락한 사이라 학생들은 서로 친해졌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동기 남학생들 반 가까이 입영 준비를 했고 그 대신 전역을 하고 다시 복학하는 남자 선배가 많아졌다. 군대를 전역한 선배들은 자신들이 신입일 때 보다 여자 신입생들이 많아졌다고 헤벌 쭉 했다. 그런 세상 물정에 뒤 떨어진 선배들에게 여학생들은 그들이 군대에 있는 2년 동안 바뀐 학교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밥을 사고 영화를 보며 한 두 명씩 썸을 타는 핑크빛 기류들이 감지됐다.
2학기 때는 교수님들이 학교 근처 미술관에서 작품회를 여셨다. 그래서 1학년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전시관 안내 및 관리를 해야 했다. 20일 정도 하는 미술관 관리를 위해 하루에 두 명씩 과에서 미술관으로 수업이 없는 공강에 맞춰서 배정이 되었다. 배정표가 1학년 실기실 앞에 붙자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순번을 알기 위해 몰려들었다. 지연도 까치발을 들고 자기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9월 12일 목요일에 이정훈 , 채지연이라고 쓰인 봉사 날짜를 확인하고 몇몇 동기들과 지연은 다음 교양 수업 강의실로 향했다. 교양 수업이 끝나갈 무렵 지연의 문자를 알리는 음이 울렸다. 강의실 책상 밑으로 문자를 확인하니 승빈오빠였다. 무슨 일인지 문자를 읽어보니 미술관 봉사 활동을 자신과 바꿔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군대에서 친한 후배가 9월 7일 전역을 전역을 하는데 꼭 만나야 하는 친한 사이라고 미술관 봉사 순서를 자기와 바꿔 달라고 했다. 지연은 그때서야 잠시 잊고 있었던 1학기때 승빈오빠가 과제를 도와준 기억이 났다. 그래서 지연은 알겠다고 했고 지연의 봉사일은 9월 7일로 변경되었다.
지연의 교통사고
9월 7일 지연은 전공 수업이 끝나고 미술관 봉사를 위해 222번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시내 근처로 가는 버스다 보니 버스 안은 만원이었다. 몇 정거장을 가자 버스 안은 사람이 적어졌다. 그래도 앉을자리는 나지 않아서 버스 손잡이를 잡고 버스 안에 붙은 광고를 읽는 순간 지연은 굉음과 동시에 버스 앞 출입문까지 튕겨 나갔다. 버스가 자가용을 피하려다가 보도블록에 부딪히고 선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연은 버스 앞문 계단 아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조그만 공간에 두 무릎이 접힌 채로 끼어있었다. 긴치마엔데 통이 좁다 보니 사고의 충격에 공처럼 굴러서 두 다리가 콕 박힌 것이다. 남자 승객들이 달려와서 지연이를 꺼내주었다. 지연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너무 창피해서 아픈 줄도 몰랐다.
" 아가씨 괜찮아요?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
"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
버스 기사는 뒤에 오는 차로 갈아타라고 승객들을 안내했고 지연도 사고가 난 버스에서 내렸다. 무릎이 욱신거리고 여기저기 뻐근했지만 봉사 시간에 늦을 까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갔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하니 그전 타임에 미술관 봉사 담당자들이 슬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야, 채지연 너 발꿈치에서 피나! "
" 근데 치마는 무슨 자국이야? 뭔 일 있었어? "
" 어.. 오다가 버스가 사고가 나서 "
지연은 창피해서 차마 데굴데굴 굴러서 버스 앞 문 열리는 틈에 끼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함께 봉사할 친구에게 잠시 말하고 지연은 황급히 화장실로 가서 옷매무새나 피가 나는 곳을 확인했다. 이곳저곳을 확인하다 보니 지연의 오른쪽 샌들 굽이 약간 흔들렸다. 지연은 굽에 충격을 주면 더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른발에 힘도 못주고 걸어야 했다. 안내 데스트에 앉아서 미술관을 지키고 있는데 평일 대낮이라 그런지 전시장에 방문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제야 골반도 쑤시고 무릎이 아파서 치마를 올려보니 버스 계단에 꼭 겼던 자국으로 양 무릎이 시퍼런 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연은 핸드폰은 꺼내서 주나에게 문자를 했다. 주나는 지연의 절친이자 같이 사는 룸메이트다.
' 주나야 어디야? 수업 끝났어? 나 미술관인데 모다가 오늘 교통사고 나서 몸이 만신창이야. 다행히 치마가 짧은 치마가 아니어서 속옷을 보이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몸이 다 멍이야...'
" 진짜? 혼자 집에 올 수 있어? 내가 갈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프긴 하네. 헤헤 "
" 근데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교통사고가 났는데 미술관 봉사라고 꾸역꾸역 봉사를 간 거야? 채지은 참 너답다."
지연은 미술관 봉사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자취방에 오니 주나가 약국에서 이것저것 사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연은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몇몇 곳에 더 멍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지만 병원은 가지 않았다. 주나가 치료해 준 연고랑 파스를 바르고 지연은 일찍 침대에 누웠다. 저녁도 안 먹고 일찍 잠이 든 지연은 문자소리에 잠시 잠에서 깨었다.
' 나 승빈인데. 너 오늘 미술관 가는 길에 교통사고 났다면서? 많이 다쳤어?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
' 괜찮아요. 한숨 자면 될 것 같아요. 근데 그걸 승빈오빠가 어떻게 알아요? '
' 어 오늘 오전에 미술관 담당이었던 애들이 말하는 거 들었어. 지금 군대 후배랑 만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인데, 괜히 나 때문에 다친 것 같아서... 내가 날짜를 바꿔 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안 다쳤을 거 아냐 '
' 에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큰 사고 아니었어요. 그러니 이렇게 살아 돌아와서 자고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낼 학교에서 봬요.'
' 어 그래, 12일엔 내가 너 대신 미술관 봉사 갈게. 잘 쉬고. 잘 자라."
차분하고 말수가 많지 않은 승빈오빠와 지연은 처음으로 길게 문자를 주고받았다.
9월 19일에 미술관 봉사에 부득이하게 결원이 생겼다. 급히 과 사무실에서 봉사 가능한 인원을 파악했지만 모두 수업에 들어가고 없었다. 단, 지연은 제도 과제를 하려고 제도판을 펼쳐 놓고 열심히 제도를 하는 중이었다. 조교는 1학년 실기실에서 제도를 하는 지연을 발견하고 미술관으로 가 줄 것을 부탁했다. 미술관에 도착하니 승빈오빠가 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물으니 승빈도 지연처럼 급히 연락을 받고 미술관으로 온 것이었다. 둘은 데스크에 앉아서 전시장에 오는 관객들에게 팸플릿을 나누어 주고 안내를 했다.
처음으로 둘만 있는 자리가 서먹했다. 그 서먹함을 깨려고 지연은 승빈께 말을 건넸다.
"저.. 지난번 홈페이지 만들어 주신 거 감사했어요. 인사가 좀 늦었지만 얼굴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
" 근데 너 네 홈페이지 디자인 궁금하지도 않니? 어떻게 그렇게 한 번을 안 물어볼 수가 있어? 사실 좀 놀랐어. 네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해준다고 한 것 같아서..."
" 아... 그런 게 아닌데. 전 오빠가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데 전화하면 더 바쁘게 해 드리는 것 같아서 전화 안 드렸어요. 보채는 것 같기도 하고 컴퓨터는 할 줄도 모르는데 이렇게 해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어서요. 오해 마세요."
" 그럼 미술관 봉사 끝내고 나한테 한 시간만 시간 내줄 수 있어. 교보문고에 누구한테 줄 선물을 사러 가야 하는데 좀 골라 줄 수 있나? "
지연은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미술관 봉사가 끝난 두 사람은 교보 문고로 갔다. 저녁이 다돼서 인지 교보에는 꽤 사람들이 있었다. 지연은 간 김에 오랜만에 책냄새도 맞고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그러자 승빈이 지연에게 다가와서 요즘 제일 재미있는 책이 뭐냐고 물었다. 지연은 요즘 사람들에게 인기라던 《 광수생각 》이 떠올랐다. 《 광수생각 》은 감성적인 글귀와 만화가 어우러져 큰 일기를 끌고 있었다. 지연은 조언이 맘에 들었는지 승빈은 《 광수생각 》을 들고 옆에 CD를 파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둘은 계산대로 향해 계산을 하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지연은 여고를 졸업하고 남자 사람이랑 밖에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어색했지만 하루 종일 굶은 턱에 배가 고팠다. 대학로에 있는 철판 볶음밥집에서 둘은 밥을 먹고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갔다.
뜻밖의 선물
승빈과 지연은 222번 버스를 기다렸다. 승빈은 집은 시내에서 가까워서 3 정거장만 가면 됐고 지연은 9 정거장을 더 타고 가야 했다. 둘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승빈이 다음 정류정에서 내리려고 벨을 눌렀다. 서로 낼 학교에서 볼 것을 약속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 정거장에서 문이 열리자 승빈은 황급히 교보문고 쇼핑백을 지연의 손에 쥐어주고 내렸다. 지연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을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창밖을 보자 승빈은 웃으며 손을 지연에게 흔들었다. 지연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승빈이가 한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때 승빈이 문자를 보내왔다. '생일 축하해. 채지연!' 그렇다 그날은 지연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혼자 자취를 하는 지연은 미역국도 못 먹고 혼자 학교에서 제도 과제를 하면서 평범하게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술관에 대타로 봉사를 가게 되었고 승빈 역시 대타로 미술관에 온 것이었다. 승빈은 어떻게 지연의 생일을 안 것인지 생일 선물을 사줄 요량으로 교보 문고에 같이 가자고 했던 것이다.
결국 지연이 고른 《 광수생각 》과 승빈이가 고른 이문세 CD도 지연의 선물이 되었다. 책과 함께 넣어있는 이문세 CD를 보고 지연은 적잖이 당황을 했다. 물론 이문세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문세의 별밤을 듣고 고등 학창 시절을 지냈으니까. 하지만 CD를 살만큼 잘 알거나 관심이 있는 가수는 아니었다. 지연은 승빈이의 음악 취향에서 세대 차이를 느꼈다. 하지만 마음은 솜사탕이 가득 찬 든 가볍고 폭신폭신했다. 간질간질 한 느낌도 났다. 자취방에 돌아온 지연은 《 광수생각 》을 읽다가 이문세 CD가 눈에 들어왔다. 주나에게 CD플레이어를 빌려서 이문세 특별 히트곡 모음 1을 들어보았다. 생각보다는 CD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이문세의 목소리는 감성적이었다. 지연은 음악을 듣다가 그날은 그렇게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 다음 편에 계속 >
이미지 출처 : unslp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