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한 채, 더 잘 살고 있다.

어느 한가한 세계로 불려나온 이유

by 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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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시간을 나는 선과 악의 싸움 속에 허비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한 날들의 놀이 친구가

내 마음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며 즐거워한다.

나는 알지 못한다.

이토록 갑자기 쓸모없고 엉뚱한 세계로 불려 나온 이유를(주).


나는 타고르 발끝에도 못 미치는

미숙한 정신의 소유자지만

나 역시 그가 말한 것처럼

알.지.못.한.다.


옳고 그름에 대해

이성과 감정이 숱하게 싸우며 허비한 긴 시간들을 지나


이렇게 한가로운 단순한 삶으로

내가 불려 들어온 이유를,

이렇게 자유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엉뚱한 세계 속에서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음을,

이렇게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감사'와 '사랑',

'신비'라는 단어가 가슴에서 입으로 연일 발화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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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왼) /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 (우)

지금 내게 신비로운 현상이란

그저 이런 것이다.


가을이 가니 추운 겨울이 오네...

얼어붙은 논위에서도 까마귀는 낟알을 줍네...

이리 세찬 바람에도 저리 가는 가지들이 버텨내네...

저 높은 낙엽송 꼭대기에 벌이 집을 지었네...

1주일 화려했던 작약은 이 긴 시간을 저리 못난 모습으로 땅으로 녹아 내리네...


그간 보지만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았을지도)

수많은 '사실'들이

지금은

굉장한 사건으로,

사건은 신비로움으로,

하지만 너무나 친밀하고 순수해서 경이로움으로

내게 스며든다.


언젠가 이런 바람을 가졌던 적이 있다.

숭고함, 경이로움, 신비함같은 단어를

활자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고 싶다고,

어떤 경험이든 내 가슴을 진동케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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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미터가 넘는 높이의 낙엽송 끝에 지어진 말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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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화려하고 360일 녹아내리는 작약
KakaoTalk_20251224_115933404_07.jpg 언땅위에서 낟알줍는 까마귀들

그런데,

이제 내가 아는 것 같다.


낙엽송 꼭대기에 집을 짓기 위해 수없는 날개짓을 했던 벌처럼

매일 비탈에 올라 모은 나무로 집안을 따뜻하게 지피는 수없는 나의 발걸음이,

낟알 하나라도 찾아내려 언땅에 부리를 쳐박는 까마귀처럼

봄에 캔 쑥부터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줄기까지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놓은 나의 손길이,

화려하게 꽃피울 봄의 그 때를 위해 저리 못나고 나약하게 버티는 벗나무와 작약처럼

언제일 지 모르지만 나만의 열매를 위해 매일 찌질하지만 읽고 쓰는 나의 정신이...


그게 그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닌가.

그들이 하는 짓이 내가 하는 짓이 아닌가.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우고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고

생존을 위해 집과 먹이를 보존하고

존재를 위해 긴 시간을 버티는...


이 얼마나 위대한 생(生)의 실천이고 실현인지,

도대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매일 반복되며 흐르는 일상보다 더 감사할 것이 무엇인지,

나는 놈은 날고

기는 놈은 기듯

걷는 놈이 걷는 것만큼 잘 살아내는 경이로움이 어디 있단 말인지,

하나의 생명이 대법에 순응하며 태어나고 자라고 피워내고

다시 지는 것만한 신비로움이 또 어디 있단 말인지...


어른이라 여겼던 시절,

숨겨진 능력을 찾고

내 자질에 맞는 일을 찾고

블루오션이라는 틈새를 찾던 나는


어른인데 아이가 된,

똑똑한데 바보가 된 지금,

드러난 것에서 진리를 보고

내 본성대로 하루를 꾸리고

블루고 레드고 상관없이 정신의 틈새를 메우는 데

여념없는 내가 되었다.


세상에서 틈새를 찾던 정신을 자연에 놓아두고

과학과 이론에서 헤매던 이성을 영혼에 맡겨두고

달력마다 촘촘하던 시간에 자유를 허락하고

여기저기 부지런하던 신체를 홀로 머물게 하니


나는 생뚱맞고 할일없는 세계로 불려 들어온 이유를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고 평안하며 여유있는

세계속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겠.다.


알지 못한 채 흘러가기만 해도 삶이 전진하는 세계가 있음을,

묻지 않아도 질문이 해답으로 이어지는 삶이 있음을,

녹여버릴 듯 덤비던 감정조차 무력하게 나를 통과하는 세계가 있음을,

바보같이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일이

어쩌면 가장 어른스러운 삶일 수도 있음을,


그렇게

하지 않지만 되어 가는 삶이,

살아내지 않지만 살아지는 삶이,

알려하지 않지만 알게 되는 삶이 있음을


나는

이제야

알겠다...


주>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에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가 쓴 서문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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