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아름 Oct 01. 2023

You are not alone

그 항아리만이 달을 품을 수 있었던거야.

밤을 새워가며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릴 때면 숨이 쉬어지지 않아 죽을 것만 같았다. 캔버스에 풍경을 옮길 때면, 내가 감히 표현해 낼 수도, 창조해 낼 수도 없는 그 다채로운 색감과 질감에 나는 감탄했고, 더 나아가 숨이 멎을 것 같은 아름다움에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밤새도록 그리고 또 그리고, 색을 만지고 또 만지다가 멍하니 보낸 날들이 참으로 많았던 지난 이십 대의 날들이다. 지는 해와 노을을 보며 웅장하고 신비한 미에 눈을 떴고, 밤하늘의 별과 달의 아름다움을 보며 벅찬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미처 흡수되지 못한 솟구치는 감정은 뜨거운 눈물로 분출되었다.


대학 졸업 이후부터는 그림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삶을 존재해내는 것과 내 길을 찾는 것에 영혼을 송두리째 다 바쳤다. 한때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길은 정해진 길이 아닌 매 순간순간마다 선택에 선택을 하며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길이었다. 외롭고 고독했고, 때론 혼란스러울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삶의 희망과 영원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밤이 영원하지 않듯 세상에 영원한 아픔이나 좌절은 없으니 말이다. 날씨가 그러하듯 어렵고 힘든 순간은 많았지만, 그래도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확신에 가슴 벅찬 감동의 날들도 많았다. 그런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서라기 보단 그저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지금도 살아 호흡하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는 날들이 더 많았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밤, 투명한 하늘에 뜬 맑은 달을 보거나 온 하늘을 집어삼켜버릴 듯한 찬란한 노을과 웅장하면서도 밀도 높은 구름을 볼 때면 그저 행복했다. 그리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이 솟구쳐 올랐다. 하늘, 구름, 달, 별, 해, 그리고 바람은 그렇게 나를 치유했고 숨 쉬게 했으며 멈추지 않게 했다.




누구에게나 봄날이 오듯, 누구에게나 눈보라 설한풍에 바바림 천둥번개 치는 날도 있다.  그러나, 끝이라는 것을 모르는 비바람 눈보라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버겁게 했고, 웃음의 흔적조차도 알짤없이 말려버렸다. 그런 나에게 웃음을 찾아주고 싶어 애타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 그저 말없이 곁에 있어주었던 그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들킬까 늘 앞에선 웃고 있어도, 때론 말보다 메시지로 소통을 해도 그는 행간에 베인 내 감정을 느꼈고, 웃으며 괜찮다는 내 말에도 짙은 아픔을 무겁게 느꼈다.  그런 날이면, 깊이 음악에 몰입되어 있는 듯했지만 그의 감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도 어쩔 수는 없었나 보다.


나는 나의 상처를 감추고 싶어 했고, 그는 그 상처를 끄집어내 마주하게 했다. 치유되지 않은 채 그렇게도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방치된 채 아물지도 못하고 덧나기만 해서 그렇게 아픈 것이라면서 말이다. 누구나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는데 나만 대수인가 싶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그 상처를 마주해 본 기억이 없었다. 그저 외면하고 부인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나였었다. 나는 그를 메이(May)라고 불렀다. 언젠가 커피 한 잔 하자며 나를 앉혀놓고, 슬픔이 침잠한 가운데 담담하게, 그리고 잔잔하게 항아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독대가 있었어. 그곳에는 매일 아침 주인이 나와서 항아리를 반질반질 깨끗하게 닦아주었데. 단 하나의 항아리만 빼고 말이야. 주인의 손길을 받은 항아리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빛이 나고 행복해 보이는데, 유독 한 항아리만이 꾀죄죄하게 있더래. 몸에 흙이 묻고 먼지가 쌓여도 주인은 닦아주질 않았어. 심지어 항아리들이 간장, 고추장, 된장 등 온갖 것들을 주인에게 내어주었지만, 이 항아리만은 빈 몸뚱이라 내어줄 것은 더더욱 없었데. 그것도 부족해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다 담아내야 했지.  다른 항아리들에겐 그저 다른 세계의 일이었지만 , 이 항아리만은 추위와 비바람에 몸서리치는 것도 부족해 빗물만이 가득 차서 넘쳤더래. 아침이 밝아오고, 눈을 뜬 항아리들은 기지개를 켜면서 서로 인사를 하는데 밤새 물을 먹은 항아리는 너무도 서러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데. 그날도 주인은 다른 항아리들을 하얗고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주는데 이 항아리에겐 또 오지도 않더래.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 항아리 친구들에게도 주인에게도 외면받은 채 밤새 찬비까지 맞아냈는데… 그런데, 그날 밤이었어. 그날따라 유난히도 달이 밝고 아름다워 주인이 마당에 나와 밤하늘을 올려보았데. 그런데 웬걸?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풀벌레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데 유독 한 항아리만이 빛이 찬란하더래. 가서 보니까 그 항아리였던거야. 손길도 주지 않았던 그 항아리 말이야. 바짝 다가가서 보니 찬란한 달을 담고 있더래"


 달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는
오직 그 항아리뿐이었던 거야.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지?


그가 어디선가 읽은 적 있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호텔에서 눈부신 미소를 가진 갓 스물이 넘어 보이는 아가씨를 만났다. 대학졸업 후 정규 직원이 된 지 이제 석 달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미소는 보석보다 투명하고 빛났다. 그녀의 눈동자도 눈도 같이 웃고 있었다. 언제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그녀를 보고 나면 마음이 맑아졌다. 그런 그녀를 아침에 다시 만났다.


“I am very happy to see you again this morning. I am so happy!”


얼굴 인사만 몇 차례 나눈 사이인데, 날 봐서 행복하다는 그녀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어쩜 저리도 웃는 게 사랑스러울까… 참 예쁘다!’가 연신 마음에서 흘러나왔다.


떠나기 전, 꾸밈없이 맑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그녀가 궁금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를 좀 더 보고 싶었다. 여느 이십 대의 여성들처럼 그녀도 뷰티에 관심이 많아 저녁은 식사대신 운동을 한다고 했다. 나도 사실은 그러했다. 우리는 근처 호수공원에 가서 함께 걸었다. 로컬들이 간다는 힙한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거리에서 하는 라이브공연도 함께 보았다. 거리에 쏟아진 수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음껏 맞기도 했다. 그동안 내가 찍어둔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명소는 가지 않았지만 그저 내가 머무는 곳의 하늘과 풍경, 노을, 그리고 구름을 찍었다. 마음에 담고 그 순간을 가슴에 새겼다. 이번 여행이 그저 쉬고 싶었던 것처럼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면서도 구름과 하늘의 색감, 찬란한 노을에 감격했고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곤 사실 자신의 이름은 May이며, 가족들은 그녀를 메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May는 구름이라는 뜻이란다. 하늘과 구름을 너무 사랑하는 자신을 부모님은 어릴 적부터 메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그녀의 모든 아이디는 May May였다. 내가 아끼는 그를 나는 May라고 불러왔는데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메이를 만났다.

May는 밤하늘의 별과 달, 구름을 사랑하고, May May는 구름과 하늘을 무척 사랑한다.

같은 이름, 같은 느낌. 참 좋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 그녀는 내게 말했다.


“호텔에서 저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데 그 미소가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정말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줬어요. 저분은 누구일까 궁금했어요”

‘내가 그랬었나?’ 그랬나 보다. 그녀나 나나 서로의 미소에 끌려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나 보다. 한참 후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한다.


“You and I are together today. You are not alone, and I am not alone any more"




뭔가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맑고 티없이 그녀의 눈이 웃는다. 아름답다. 달이 맑고 찬란하다. 달 옆에 별이 하나가 빛난다. 목성만 같았다. 별지도를 꺼내어 확인하니 맞다. May May에게 별지도를 보여주며 목성을 알려주었다. 내가 처음 목성을 보았을 때처럼 그녀도 그랬다. 노오란 나트륨 가로등은 따스하게 거리를 비추었고, 달과 별은 맑고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보슬비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내린다. 이 모든 불빛과 달, 별, 그리고 보슬비까지 동시에 쏟아진다. 우리는 밤이 깊도록 그렇게 호수를 걸었다. May가 보내온 달도 마음에 같이 띄우고 말이다.

인생을 가는 길목에서 우린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고 알아보게 된다. 나는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뿜어내는 미소가 꾸밈없고, 그녀의 눈빛이 달처럼 맑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곱고 예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그녀의 삶을 보듬어주고 싶고, 앞으로도 선하게 빛나게 살아갈 그녀의 마음씀을 사랑하고 싶다. May가 내게 그리했듯, 나도 May May에게 말이다.

이전 10화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이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