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두번째 이야기.
사흘째 검은색 옷을 입고 출근을 한다.
신축성 없는 옷 탓에 삼일 내내 몸이 불편하지만 마음보다 불편하지는 않다.
고인의 친구뻘도 못 되는 먼 지인인 나는, 사실 슬퍼할 자격이있는지 자문해본다.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보다는 어쩌면 언젠가는 누구도 떠날 수 있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 자신을 몰아붙여 살아왔구나 하는 자책 어린 슬픔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또 한 번 슬퍼할 자격을 잃는다.
열흘이 넘어가는 오늘, 우리 집단은 한 번도 한자리에 함께 모여 눈물을 나누지 않았다.
모두 검은 옷을 입었지만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해 나갈 뿐이었다.
어쩌면 그 생략된 애도의 시간이 모두의 마음에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인과의 친분 여부를 떠나, 곁의 누군가가 떠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 곳에 모여 애도하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 사람의 마지막은 외로웠을까? 자조했을까? 누군가를 원망했을까?
나였다면? 만약 나였다면?
끝이지 않는 질문을 속으로 삭이며 애써 태연한 척 이족보행을 하던 나는 결국.
수업을 하다가 울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게 떠드는 아이들,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시스템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부품에 불과한 나. 되려 선생님이 예민하다며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아이들.
무슨 일일까. 대체 무슨 일.
혹시 그 사람의 죽음을 이용해 나는 내 슬픔과 우울을 숨기지 않아도 되어 안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 사람의 죽음을 이용하는 게 사실이라면 나는 과연 인간의 자격이 있는지. 나는 왜 혼란스러운지. 왜 마음이 아픈지.
왜 우리는 마음껏 애도하지 못하는지.
애도라는 말에 다시금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간다.
애도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이런 말들을 아이들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눈물이 나서 운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잔인하게도 정해진 진도량이 있어서 눈물을 닦고 진도를 나가야 했다.
말이 꼬이고 정신은 뒷전이었지만, 한 시간 내내 나 혼자 울고 있을 순 없었으니까. 그건 암묵적인 규칙 위반이다.
어렵게 수업이 끝났다. 아이들은 종이 울리자마자 우르르 뛰어나갔고.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조용히 숨을 고르며, 내가 느낀 슬픔이 고인을 향한 것인지, 나 자신을 향한 것인지 분간하려 했다.
그러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인간의 슬픔이란, 애도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진실해지는 것일까?
결국 남은 건 살아 있는 우리라는 사실에 마음이 저렸다. 누군가의 부재 앞에서야 비로소 남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언제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더 사랑해야겠다고, 더 따뜻하게 안아야겠다고.
나는 내일도 검은 옷을 입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