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퍼퓸 Apr 19. 2023

"이거요"

“수학은 누가 만들었어요?”

“공부는 누가 만들었어요?”

“읽기는 누가 만든 거예요?”

“쓰기는 누가 만들었나요?”     


가끔은 아이들의 이런 질문에 정답은 아니더라도 도움이 되는 대답을 해주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이 질문은 공부 자체에 대한 놀라운 호기심과 학구열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공부하기 싫어졌다는 신호다. 이 신호등이 켜지면 자연스럽게 관심을 공부로 돌려줘야 한다. 관심을 돌리지 않고 이런 질문에 답을 해주기 시작하면 그날 공부는 다 끝나게 된다. 어떤 질문은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바로 불평을 가장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공부에 그나마 집중했을 때 하는 질문은 다르다.

“이거요.”     


‘이거요’라니. 이런 말을 학생들이 하면 다들 이게 뭔 질문인가 싶을 거다. 나 역시 처음 ‘이거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뭐가요?’라고 맞받아치고 싶었다. 공부하기 싫을 때는 따져 묻다가 막상 자신의 공부와 관련된 질문을 할 때는 “이거요”가 질문이다. 물론 바로 설명을 해주지는 않는다. 먼저 해당 문제를 내 앞에서 소리를 내 읽어보도록 하고 그래도 모르면 해당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 다시 읽어보도록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문제를 풀려는 의지 없이 나의 설명에서 답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다 답만 받아쓰고 그렇게 다른 문제도 후다닥 답만 베껴서 공부를 끝내려 하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한 남학생은 “몰라요”라는 말 한마디로 교재에 있는 모든 문제를 나의 설명으로 풀려고 했었다. 그냥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려다 꾀를 낸 것 같았는데 너무 심각하게 “몰라요”, “정말 모른다니까요.”라는 말로 나를 헛갈리게 했던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을 방지하기 위해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제를 소리 내어 읽고 해당 내용을 찾아 다시 읽으면서 생각하는 시간은 갖는다. 다시 읽어보라고 하면 너무 대충 읽기 때문에 해당 문제의 키워드를 표시하고 그 키워드라도 찾아서 밑줄을 치도록 했다. 학습자가 관련 내용을 알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한 후에 그래도 모르면 설명을 해준다. 이렇게 하니 수동적으로 “몰라요”라는 말을 남발하지 않고 스스로 교재를 읽으면서 공부하기도 한다.      


“몰라요”, “이거요”라고 말하는 학생은 그나마 예의라도 갖춘 질문이다. 이런 말도 하기 싫은 일부 고학년 학생은 내 앞에 교재를 올려놓고 모르는 문제를 가리키면서 탁탁탁 소리가 나도록 연필로 친다.     


종종 겪는 일이건만 매번 처음 겪는 것처럼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다. ‘이게 뭔 일인가?’, ‘학생의 이런 태도가 옳은 태도인가?’에 대해 나 자신도 판단을 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재빨리 황당한 마음을 수습하고 냉정하게 그러한 행동이 옳지 않은 행동임을 알려 줘야 한다.     


“질문을 할 때는 문제를 먼저 소리 내어 읽어보고 모르는 부분을 말로 해야지, 이렇게 연필로 교재를 치면서 가리키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집에서 부모님께도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집에서도 안 되는 건 여기서도 안 되는 거야.”


하지만 그때뿐이다. 예의 바르게 잘하다가도 어느 순간 공부하기 싫어지면 어김없이 연필로 탁탁탁 치면서 자신은 그 문제를 모르니 어서 설명이나 하라는 식이다. 비록 일부 학생의 행동이지만 이렇게 예의 없는 행동을 보면 오만가지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아무것도 모르면 질문이 없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이기에 질문은 그 아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공부에 흥미가 없고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에 더 나아갈 수 있는 질문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부를 억지로 시키는 것보다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호기심을 키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 바른 교육이 아닐까?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마크 쿨란스키의  <무엇?(What?)>이 떠올랐다.


<답변을 얻으려면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가? 질문도 없는데 나온 답변은 불신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 우리가 '물음표'를 사용하는 이유는 물음표가 없으면 눈앞에 있는 질문을 뻔히 보고서도 질문인지 아닌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인가?>

-  마크 쿨란스키, <무엇?(What?)>     



마크 쿨란스키는 어떤 계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질문으로 채우게 되었을까?

나도 마크 쿨란스키의 질문을 따라 해 볼까?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공부하기 싫은 마음을 질문의 형식으로 하는 이유는 뭘까?

아이들의 모든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주는 것이 좋은 지도 방법일까?

불평을 가장한 아이들의 질문에 좀 더 지혜롭게 대답해 줄 수는 없었을까?

차라리 아이들이 질문을 잘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이들이 질문하는 방식이 예의 없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지적하는 것이 옳을까?

어쩌면 질문의 형식도 아니고 질문도 아닌데 바로 질문으로 받아들인 나의 잘못일까?

아이들이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도록 내가 좀 더 잘 지도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질문을 잘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가?

내가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친답시고 아이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질문을 막은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마음속에서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질문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싫어하는 질문은 무엇일까?

어떤 질문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이들이 듣고 싶은 질문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어떤 질문이 아이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아이들과 모든 대화를 질문으로만 하는 놀이를 하는 것은 어떨까?     

이 많은 질문에 대해 누가 답변을 해줄 것인가?

누군가에게 답변을 구해야 하는가? 내가 스스로 찾아야 하는가?

모든 질문에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가?

질문 속에 답이 있는 질문도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챗GPT는 아이들의 질문에 과연 현명한 답을 해줄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을 챗GPT에게 물어보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브런치에 이런 형식으로 글을 써도 될까?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전 15화 조진감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